플란다스의 개 다시 보는 남자 #9
네로가 장작을 구하러 숲에 가는 날, 지나는 길에 네로는 아로아와 마주친다.
네로 : 오늘은 예쁜 브로치를 했네?
아로아 : 진짜 예뻐?
네로 : 응 너랑 잘 어울려.
아로아 : 아빠가 선물로 주신 거야. 내 생일도 아닌데.
뭘 해도 이쁠 나이다. 암튼, 네로가 숲에 간다고 하자 아로아는 자기도 같이 가고 싶다고 한다. 그렇게 네로와 아로아, 파트라슈는 함께 숲에 간다. 일단 장작을 구하는 건 뒷전이다. 네로와 아로아는 숲에서 파트라슈와 함께 실컷 뛰어논다. 목이 말라 계곡에 가 물을 마시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계곡으로 향하는 길에 아로아는 브로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도,
괜찮을 거다. 아로아네 집은 부자니까. 브로치 하나 잃어버려도 그까이꺼 하나 더 살 수 있다. 하나가 뭐야. 아로아 아빠는 몇십, 몇 백개는 사줄 수 있을 것이다. 아로아는 실수를 해도 괜찮은 나이이자, 꽤 괜찮은 환경에서 살고 있으니까. 하지만 네로는 아로아가 잃어버린 브로치를 걱정한다. 네로는 걸었던 길을 되짚으며 브로치를 찾아 헤맨다. 찾다가 가시에 찔려 손을 다치지만, 그래도 열심히 찾는다. 네로는 아로아가 잃어버린 산딸기 바구니를 찾았던 때처럼, 아로아와 관련된 일이라면 항상 최선을 다한다. 아로아가 실수하면, 네로는 수습한다. 네로와 함께라면 아로아는 든든하다.
대학시절, 나도 아로아 옆에 있는 네로처럼 누군가가 곁에 든든하게 있어주었으면 좋았겠건만, 곁에 있었던 건 *든든학자금 대출뿐이었다.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름처럼 제법 든든했다. 덕분에 무사히 대학을 졸업했고, 나름 든든한 회사에 입사했다. 회사는 든든했지만, 회사원이 된 나는 네로처럼 든든한 사람은 아니었다. 혼자 의욕에 넘쳐 동기들을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고, 일머리가 없어 선배와 상사를 곤란하게 만든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실, 수십 수백 번이다.
나는 언제쯤 든든해지려나.
흔히 말하는 대기업에서 일하며 이십 대를 마무리했고, 삼십 대가 되면 든든하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삼십 대가 된 나는 여전히 덜 든든하다. 든든학자금 대출은 아직 갚는 중이다. 인격과 정신의 든든함 대신 아랫배가 정말 묵직히 든든해졌다. 이쯤 되면 든든해지는 건 다음 생으로 넘겨야 되지 않을까.
아로아 : 네로, 이제 그만 해. 이렇게 열심히 찾는데도 안 보이잖아. 그러니까 됐어.
네로 : 그렇지만 그 브로치는…
아로아 : 아빠한테 한 개 더 사달라고 하면 돼.
아로아는 잃어버린 브로치를 찾아 헤매는 네로에게 괜찮다고 말한다. 뭔가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당당한 말과 자세다. 그 무언가가 없으면 사람은 작아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브로치를 잃어버린 아로아는 괜찮았다. 아빠한테 한 개 더 사달라고 하면 됐다.
나는 아로아처럼 부자 아빠와 든든한 네로를 두진 않았지만, 실수는 과감하고 신속하게 저질렀다. 흔한 *이불킥 얘기처럼 술에 취한 밤에 ‘잘 지내?’ 란 문자도 보내봤고, 기한이 정해진 중요한 업무를 놓치기도 하고, 괜한 사람에게 메일을 잘못 보내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커뮤니케이션도 서슴지 않았다. 실수의 순간 움츠러들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도망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삶은 어떻게든 살아졌다.
휘영청 달 밝은 밤에 보낸 알코올 농도 짙은 문자는 읽씹(읽고 씹힘) 당했고, 중요한 업무를 펑크 내도 회사는 그런대로 잘 굴러갔다. 잘못 보낸 메일은 구구절절히 적은 사과의 메시지와 함께 조용히 흑역사 아카이브에 저장되었다. 이제 나는 실수를 한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라고 물었을 때 시원하게 대답할 든든한 배경 없어도 실수할 수 있었고, 실수했을 때 쿨가이인척 조금 덜 움츠러드는 법을 배웠다. (그렇다고 실수했을 때 POWER 당당 하지는 않다. 양심은 있지.) 실수 컬렉터인 나는 여전히 열심히 실수 사례를 모으고 있다. 어차피 온전하게 완벽한 삶을 살지 못하기에, 술자리에서 잘근잘근 씹을 안주 거리 실수를 꾸준히 생산하고 있다. 괴발개발 쓴 이 글도 훗날 실수 리스트에 들 수 있으리라.
이십 대에 예상했던 삼십 대의 멋진 내 모습은 아니지만… 어쩌겠는가. 뚜벅뚜벅 내 길을 가겠지. 삼십 중반을 향해가는 지금도 어김없이 실수가 이어질 것을 예상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을 거다. 실수해도 세상은 끝나지 않으니.
Ps. 결국, 파트라슈의 도움으로 네로는 아로아의 브로치를 찾는다. 될 사람은 역시 뭘 해도 된다.
*든든학자금 대출 : 한국장학재단에서 운영하는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 제도다.
*이불킥 : 자려고 누웠을 때, 부끄럽거나 창피스러운 일이 불현듯 생각나 이불을 걷어차는 일을 뜻한다. 내 전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