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란다스의 개 다시 보는 남자 #10
네로 할아버지 : 부탁하네. 파트라슈를 손자에게 넘기지 않겠나?
철물상 : 그러면 얼마나 줄 거요?
설마 뻔뻔하게 공짜로 달라는 건 아니겠지?
네로 할아버지 : 으음... 끙. 그냥 줄 거라곤 생각 안 했네. 진짜 뻔뻔한 건 자네 아닌가?
철물상 : 뭐야?!
언제까지 파트라슈의 원래 주인이었던 철물상을 피할 수 없었다. 앤트워프에서 네로와 파트라슈 일행을 마주친 철물상은 파트라슈를 내놓으라고 겁박한다. 이를 알게 된 네로 할아버지는 철물상과 담판을 지으러 간다. 실은 담판이라기보다 부탁에 가깝다. 남들처럼 개를 키우고 싶은 네로의 소박한 바람은 난관에 부딪힌다.
평범한 삶,
보통의 삶을 산다는 것.
우리가 아는 다수들의 삶을 낙타등 같이 가운데가 불룩 솟은 도수분표포로 떠올려봤다. 그래프 앞과 뒤의 꼬리는 얇게 뻗어나가고, 정중앙의 가운데는 두둑하다. 대부분을 차지하는, 불룩 솟은 그 넓은 공간에 내 자리는 어디인가 싶었다. 보통의, 중산층의, 평범한 삶을 산다는 것은 대부분의 소박한 소망이면서도 또 쉽게 이루지 못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평범하게 살아라'는 부모님 말씀은 생각보다 '평범'하지 않았다. 부모님 바람에 따라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갔고 일상에서 나름 치열하게 살았다. 가끔은 뿌듯했고, 가끔은 자랑스러웠고, 그 가끔의 빈도보다 더 많이 빡(?)치며 일했다. 너덜너덜해진 몸과 멘탈을 이끌고 271번 파란 시내버스에 몸을 욱여넣은 채 집과 회사를 오갔다. 평범하게 산다는 건, 지독히도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 그렇다고 모든 일이 즐겁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파도 표면에 떠오르는 은빛 거품처럼 즐거움은 반짝 빛나기도 했지만, 파도가 사그라드는 순간처럼 순식간이었다는 말이다.
보통의,
평범한 집처럼 개를 키우고 싶은 네로의 바람처럼 나도 보통과 평범에 수렴하고 싶었다.
철물상 : 영감님이 정 그렇게 원한다면 팔아주지.
대신 2프랑은 줘야겠어!
네로 할아버지 : 2프랑이나... 그건 너무 심하잖아! 2프랑이면 한 달 내내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네.
그런 돈은 없어.
철물상 : 못 내겠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난 파트라슈를 돌려받으면 되니까.
네로 할아버지 : 잠깐만 기다려주게. 오늘은 이것만 받아줄 수 없겠나? 모자란 금액은 내가 매달 조금씩 갚겠네.
철물상 : 그럼 3프랑은 받아야겠어! 아까는 아까고! 매달 조금씩 내려면 당연히 이자도 내셔야지. 파트라슈는 3프랑이오! 어떻소 영감님. 그래도 사겠소?
파트라슈를 무자비하게 채찍질하고 쓰러질 때까지 혹사시켰던 철물상은 마지막까지 그 역할에 충실하다. 네로 할아버지는 고이자(?) 장기 할부로 철물상에게 파트라슈를 인도받는 거래를 한다. 근근이 자기 앞의 생을 버티는 네로 할아버지 사정은 조금 더 퍽퍽해진다.
국민학교(다시 말하지만, 저학년 때까지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였다.) 시절 철없이 보던 만화영화 속 인물의 삶이 이리 절절할 줄이야. 보통이 되기 위한 일상 속에서 사원 1, 사원 2로 살고 있는 30대의 내 마음도 먹먹해졌다. 속이 타 기다란 수입 맥주 두 캔을 다 비웠다. 네로의 바람과, 네로의 바람을 지켜주고 싶은 할아버지의 치열함, 현실을 대변하는 철물상의 무자비함이 대비되는 장면에서 플레이를 잠시 멈추고 맥주 한 캔을 더 집었다. 다시 플레이.
네로 할아버지는 철물상과의 거래 내용을 숨긴 채, 네로에게 철물상이 파트라슈의 소유권을 포기하기로 했다고 말한다. 사실, 우유를 배달하고 받는 돈은 굶지 않고 한 달을 버틸 금액이었다. 할아버지는 그중에서도 적은 돈이지만 매일 조금씩 집세를 낼 돈을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네로와 파트라슈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돈을 계속 모으겠다고 결심한다. 물론 네로는 할아버지가 이렇게 힘들다는 걸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네로의 마음속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고, 나는 먹먹함을 가득 채우고, 맥주도 배에 가득 채웠다. 지난날 멍하니 보던 플란다스의 개를 다시 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고추냉이를 잔뜩 묻힌 두툼한 초밥을 먹듯 감정의 포만감과 더불어 코가 찡했고, 알싸함에 눈가가 그렁해졌다. 30대 직장인의 말랑한 감수성에 새삼 놀라며, 그저 평범하게 개를 키우고 싶은 네로를 생각했다.
난 평범이 꿈이네,
넌 평범을 꾸며내.
래퍼 우원재가 쇼미 더 머니에서 불렀던 가사다. 라임도 라임이지만, 특유의 마이너한 감성과 가사가 떠오르는 생각과 맞닿았다. 평범이 꿈이며, 평범을 꾸며내는 양가적 삶을 사는 나는 노래를 들으며 또 또 또 또 또 또 또 걸었다.(이건 가사 오마주다.) 평범이 대체 뭐야,라고 생각하며 '평범하다'를 사전에서 찾아봤다.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란 뜻이다. 하지만 말 그대로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 없이 보통인 삶을 살려면, 평범하면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 아이러니였다. 기업에 입사하고자 하는 지원자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경험과 성과를 보여줘야 했고, 그렇게 특별한 사람만이 평범한 회사원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평범한 회사원이 되어 번듯한 내 집을 마련하려면, 평범하지 않은 재테크 방법을 익히거나, 평범하지 않은 부를 지닌 부모님을 가졌어야 했다.
뭐, 이런 식이다. 그리스 신화 속, 자신의 꼬리를 잡아먹는 우로보로스의 뱀처럼 전제와 결과는 물고 물려있었다. 평범이 지향되는 패턴을 보아 하니 평범한 삶은 닿을 수 없는 환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평범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었나 싶었다. 보통과 평균, 평범의 기준을 스스로 세우고 옭아매고 있지 않았을까.
평범에 대한 지향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니 뭉친 어깨가 조금 풀린 기분이다. 부모님께서 말씀하진 '평범하게 살아라'란 말씀을 어겨도 죄송스럽게 생각하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조금 더 힘들겠지만, 네로 할아버지는 네로에게 행복한 유년기를 선물할 수 있었다. 그게 어딘가 싶다. 파트라슈의 존재가 주는 행복감은 부모님을 잃은 네로에게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일테니 말이다. 퍽퍽한 삶을 견뎌낼 가치는 충분히 있으니.
보통의 삶이란게,
별거 있으랴.
Ps. 네로 할아버지는 철물상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작은 항아리에 따로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펀치라인 : 힙합에서 동음이의어를 사용한 중의적 표현을 족적으로 사용하는 가사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