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란다스의 개 다시 보는 남자 #11
주말에 푹 쉬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2%의 갈증이 있었다. 오전이 지나 눈을 떠도 묵직한 피로감에 여름날 아스팔트에 들러붙은 껌처럼 침대에 눌어붙기 일쑤였다. 육체적 피로보다 정신적 피로 때문이다. 일하며 젊음과 건강만 소모해가는 줄만 알았는데 정서의 우물도 말라가고 있었다. 자도자도 피곤하다. 여전히 누운 채 배달앱으로 혼자 먹기 좋은 1식을 주문했다. 방 문 너머 초인종 소리가 뒷가에 때려 박히고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결제도 폰으로 미리 해놓아서 건네 받기만 하면 됐다. 묵직한 몸으로 묵직한 배달 요리를 먹으며 ‘출발 비디오 여행’을 봤다. 여행은 역시 비디오 여행이다. 밥알을 우걱우걱 씹으며 언제부터 내주말이 이리되었을까,라고 생각했다.
워라밸,
이 무너졌다.
워라밸은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Work and Life Balance의 줄임말이다. 처음 들었을 때이게 무슨 말이야,라고 생각했지만 스잘데기 없는 것도 줄이는 시대에 이 또한 그런가 보다 싶었다. 워라밸은 말 그대로 ‘일과 삶의 균형’ 이란 뜻이다.
일상을 돌아봤을 때, 일work은 넘치는데 내 생활life은 턱없이 부족하게 살고 있었다. 균형blance은 온데간데없다. 이는 비단 나만 느끼는 감정과 이슈가 아니다. 직장인들 사이에서 워라밸이란 표현은 다니고 있는 회사와 직무에 대한 주요한 평가 요소가 되었다. 다니는 회사의 네임 밸류, 복지, 연봉도 중요하지만 일과 삶의 균형이 점점 우선순위에 오르고 있는 상황이다. 쉽게 말해 ‘저녁 있는 삶’을 갖고 싶다는 말이다.
건강을 회복한 파트라슈는 할아버지가 끄는 수레를 끌고 싶어 한다. 우유통이 가득 담긴 수레를 할아버지가 끌려고 하면 파트라슈는 수레 손잡이 앞에 앉아 꼼짝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을 돌봐준 가족에 대한 보답으로 수레를 끌려고 한다.
네로 : 할아버지, 파트라슈가 또 짐수레를 끌고 싶다는데요?
네로 할아버지 : 마음은 참 고맙구나. 근데 안 그래도 돼. 신께선 너희 같은 개에게 인간처럼 일하라는 사명을 주시진 않았단다.
꼭 돕고 싶다면 끌 수 있게 끈을 만들어주마. 그때까지는 그냥 나에게 맡겨두렴.
신께선 개에게 인간처럼 일하지 말라하셨지만, 인간에게 개처럼 일하는 건 허락한 모양이다. 다행히도 내가 다니던 회사에선 가끔씩 개처럼 일했다. 이건 정말 다행이다. 암튼, 작금의 취업난에 개처럼 이라도 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위안이 된다. 하지만 이 위안은 정신승리만 될 뿐, 워라밸 수준은 여전히 그닥이다.
늘어진 주말을 흘려 보내고 다시 월요일, 열대 지역 스콜처럼 쏟아지는 업무를 쳐내고 집에 왔다. 카카오톡 업무 단체방의 숫자는 여전히 시뻘겋다. 채팅방에 들어가 메시지를 읽으면 숫자 1은 사라지지만, 내 일은 늘어난다. 오, 놀라운 테크놀로지. 몸뚱이는 사무실에서 나왔으나 정신은 24/7 접속 중이다. 기술의 발달은 자유의 퇴화를 불러오기도 한다는 점을 크게 깨닫는다. 내일 아침 쏟아지는 잔소리가 무서워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단체 채팅방에 들어갔다. 상사 지시를 확인했다는 ‘넵’ 들이 주욱 나래비 서 있다. ‘네’는 조금 가벼워 보이고, ‘넵’은 조금 더 잽싸고 빠릿빠릿해 보인다. 나도 내용을 확인했다는 의미로 ‘넵’의 꼬리를 이어 붙였다. 내일은 조금 일찍 출근해야 되니 알람도 몇 개 더 박아 넣었다.
프랑스에선,
업무 시간 외 상사와 연결되지 않을 권리
를 노동법에 규정하고 있다.
프랑스는 2017년 1월부터 50인 이상 기업에 대해 업무 시간 외 전화, 이메일, 소셜 미디어등을 통한 업무 지시를 금지하는 '로그 오프 법'을 시행 중이라고 한다. 무한히 이어진 네트워크 사회에 원치 않아도 접속이 되어 시간 외 업무를 강요당하는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이다. 역시 레미제라블의 나라다. 엉망인 내 워라밸을 떠올리며 뉴스를 봤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퇴근 후 카톡 금지 법’이 발의되어 법안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조금은 나아지겠지라,라고 기대해 보지만 오늘내일은 아니다. 자, 일합시다.
김대리, 내일 오전에 상무님 회의 자료가 필요한 데 일찍 나와서 만들어 놓을 수 있지?
넵!
대답은 참 잘하는 나다.
경쾌하게 대답했지만 기분은 유쾌하지 않다. 블루투스 스피커로 선곡해 놓은 힙합 음악을 크게 틀었다. 분노의 감정을 가사로 표현하는 힙합은 직장인들에게 잘 어울리는 음악이다. M.net에서는 고등학생이 랩 하는 ‘고딩래퍼’ 대신 직장인들의 한풀이 ‘직딩래퍼’를 만들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괜히 불끈해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오른다. 캔맥주 하나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카드값과 대출을 떠올렸다. 놀랍게도 차분해지는 나를 발견했다. 워워.
네로 할아버지와 네로는 은혜를 갚으려는 파트라슈 덕에 워라밸이 좋아진다. 베푼 만큼 거두는 법이다. 네로와 네로 할아버지만큼 회사가 나에게 베풀면 수레를 끌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업무 시간에 일하고 퇴근 후에는 여유를 즐기는, 지극히 평범한 워라밸을 꿈꿔본다.
다들 각자의 워라밸을 잘 챙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