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란다스의 개 다시 보는 남자 #13
앤트워프에서 할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러 가던 길,
네로는 미술용품을 파는 가게를 지나간다. 가게 안에 쌓여있는 하얀 도화지를 본 네로. 네로는 나무판자와 돌이 아닌 새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고 싶다. 도화지 가격은 10 상팀centime(당시 벨기에 화폐 단위).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사는 네로 집 형편으로는 조금 버거운 금액. 헤, 하고 입을 벌린 채 도화지를 바라보던 네로 옆으로 멀끔히 차려입은 비슷한 또래 아이가 마차에서 내려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이름 모를 부잣집 아이 : 늘 쓰던 도화지 주세요.
미술용품 가게 주인은 다시 마차에 올라탄 아이를 마중 나오며 마차까지 도화지를 손수 들고 나온다. 마차는 떠나고, 네로는 조금 그렁한 눈으로 마차가 떠나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본다.
씁쓸하다.
원작 동화에서 네로는 중학생 정도의 나이. 하지만 만화영화에서 네로는 8~9살 정도의 어린 아이다. 이 장면은 어린아이가 맛보기에는 너무 쓴 경험이다. 갖고 싶은 도화지를 갖지 못해 혼자만의 아쉬움을 느꼈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자기 또래의 부잣집 아이의 애티튜드와 대사는 네로의 입맛을 더욱 쓰게 만들었다. 언제나 그랬듯 박탈감은,
참 상대적이다.
짧은 몇 초의 컷인데 마냥 그 장면이 길게 느껴졌다. 순간,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몇 시간 다른 행성에 다녀왔다가 우주선으로 돌아오니 몇십 년이 흘러있는, 그런 특수 상대성이론이 적용되는 듯한 묘한 기분이었다. 빨리 그 감정과 순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만화영화는 늘 그렇듯 무심히 플레이되고 있다. 작가는, 그리고 만화영화 제작사는 왜 이리 씁쓸한 만화영화를, 아니 동화를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을까. 다시 생각의 꼬리는 나에게로 돌아와, 저 자리에 서있는 네로와 지금의 나는 그리 다르지 않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내 나이 서른 살 언저리가 되면 청담동에 있는 어둡고, 향기 좋은 그럴듯한 위스키 바에 폼나게 차려입고 들어가 익숙한 바텐더에게, 늘 마시던 걸로,라고 말하며 여유로운 야간 생활을 보낼 줄 알았다. 개뿔. 현실은, 늘 하던 거 알지?라고 모니터가 나에게 말을 건네는 냄새 좋은 사무실에서 여유로운 야근 생활이 펼쳐졌다. 그래도 이렇게 일 할 수 있는 게 어디야…라고 나를 위로하며, 퇴근길 회사 앞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마시며 퇴근행 버스를 타러 털래털래 걸어가곤 했다. 그래, 감정은 상대적인 거였지. 폰을 열어 늘 단군 이래 최악이라는 취업난 뉴스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구직자와 재직자라는 상대적 입장 차이의 불편함을 나의 위안 삼아 질 안 좋은 자기 위로를 안주 삼았다. 서울 강북을 횡으로 관통하는 파란 271번 버스에 몸을 실어 멍하니 시선을 밖으로 던졌고, 때깔 좋은 독일 자동차의 정수리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마차를 바라보던 네로의 마음을 힘껏 나에게 이입할 수 있었다.
어찌… 그 장면을 곱씹다 보니 99퍼센트 함량의 카카오 초콜릿을 우걱우걱 씹듯, 쓰다.
한스 아저씨 : 네로,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너 5 상팀 벌고 싶지 않니?
네로 : 네에? 5상팀이요?
한스 아저씨 : 그래. 통을 하나 주문했는데 그게 앤트워프에 도착했거든. 오늘 가지러 간다고 약속했는데, 코제트 나리의 마차를 빌리려 했더니 오늘은 안된다지 뭐냐. 공짜로 해달라는 건 아니니까, 네 가 우리 집까지 가져다줄래?
네로 : 그러면 정말 5상팀을 주시는 거예요?
한스 아저씨 : 그래. 파트라슈하고 같이 갔다 오면 주마.
이런 안 좋은 상황에서도 약자를 이용하려는 악랄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만화영화는 실로 현실적이다. 네로네 집주인 한스는 네로에게 심부름을 시킨다. 심부름 값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기분 좋은 네로는 파트라슈와 함께 앤트워프로 향한다. 그러나 한스 아저씨의 말과 달리 묵직한 통은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다. 파트라슈는 힘에 겨워 겨우 수레를 끌고, 네로는 뒤에서 밀며 저녁 늦게서야 한스 아저씨 집에 도착한다.
한스 아저씨 : 좋아. 두 통 다 제대로 왔구나. 고생 많았다 네로. 이만 가보거라.
네로 : 어?
한스 아저씨 : 맞다! 5상팀을 주기로 했지. 그건 다음 집세에서 빼주마. 할아버지한테 그렇게 전해라.
네로 : 네에. 파트라슈 가자.
어깨를 주욱 늘어뜨린 채 집으로 돌아가는 네로와 파트라슈를 보니 잇몸에 생선가시가 박힌 듯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이다. 너무도 현실적인 이야기에, 이건 어른들을 위한 만화영화구나,라고 생각했다. 상대적 약자의 입장을 이용하고, 이를 통해 이익을 교묘하게 챙겨가는 모습은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네로는 그저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고 싶었을 뿐인데, 가까워지는 것 같았는데, 또 그게 아니었다. 주인공이란 아이가 이러고 있으니 그야말로 속이 뒤집힐 지경이다. 후우. 이번 편은 유난히 속이 쓰리다. 네로는 언제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언제,
때깔 좋게 차려 입고, 늘 마시던 걸로,라고 바텐더에게 말하며 야근이 아닌 야간 생활을 즐길 수 있을까?
네로는 마음씨 좋은 미쉘 아저씨의 장작 나르는 일을 도와 결국 10상팀을 받게 된다. 10상팀을 받게 된 네로는 단박에 앤트워프 미술용품 가게로 달려가 하얀 도화지를 산다.(10상팀을 자꾸 발음하니 뭔가 욕 같은데, 이건 기분 탓일 거다.) 네로는 종이 냄새를 맡고, 도화지에 볼을 부빈다. 만화영화를 보낸 내 얼굴도 자연스레 아빠 미소다. 아니, 삼촌 미소다. 아직 아빠 나이는 아니다.(단호) 눈 앞에 아른거렸던 하얀 도화지를 손에 들고 집으로 뛰어가는 네로의 모습은 첫 차를 갖게 되었을 때, 엉덩이 들썩들썩거렸던 내 모습이랑 비슷했다. 물론 할부로 구입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 이건 팁인데, 회사에 정이 떨어지거나 다니기 싫을 때 과감하게 비싼 물건을 할부로 살 것을 추천한다. 곧 죽어도 회사를 열심히 다니게 된다. 진짜다.
나를 회사로 데려다주던 파란 271번 버스 색을 닮은, 퍼시픽 블루라는 그럴듯한 컬러명을 가진 차를 뽑았다. 하얀 도화지를 조심스레 다루던 네로처럼 나도 차를 그윽하게 바라보고 외관을 만지고 사진도 찍고 폰과 블루투스 연결을 하고 음악을 틀었다. 노래를 크게 틀고, 지금 당장 돈이 없어도 차를 뽑을 수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과 나의 신용도에 감사하며 창문을 열고 달렸다. 파트라슈처럼 꼬리는 없어도 꼬리가 헬기 프로펠러처럼 도는 기분이었다. 평일이 돌아오면 모니터를 째려보며 야근 생활을 하겠지만, 좋았다.
늦은 저녁,
회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문을 들어서기 전, 덩그러니 나를 기다리는 차를 쳐다봤다.
그래. 이만하면 됐다. 청담동은 조금 더 나이 먹고 가도 좋을 것 같다.
Ps. 차에서 처음으로 틀었던 곡은 쇼미더머니 시즌4에 나왔던, 인크레더블의 '오빠차'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