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란다스의 개 다시 보는 남자 #15
1
주저할 때가 있었다. 그것도 꽤 많이.
2
창백하게 질린 빈 모니터를 바라보다, 무엇을 적어야 할지 고민했다. 애꿎은 얇은 커서만 제자리에서 껌벅껌벅 열일한다. 게으른 나와 달리 이 녀석은 참 부지런하다.
주저한 경험을 쓰려다, 주저했다.
3
창을 띄워놓고 주저했던 이런저런 단상이 머릿속에서 핑퐁 치다가, 한숨 한 번 쉬고 자아성찰 시간을 갖는다. 아 한심스럽다. 키보드를 만지작 거리던 손으로 마우스를 잡고, 기분 전환이나 할 겸 웹 브라우저를 클릭한다. 어, 어 하다가 정치 뉴스를 클릭. 맘 속으로 욕지거리 한바탕 하고, 대종상 시상식 뉴스가 번뜩이길래 눌러본다. 이번 주 개봉할 영화를 살펴보고, 음 누구랑 보지?,라고 생각한다. 맞다. 나 혼자 봐야 하지? 이젠 소개팅도 뜸해졌다. 이건 또 뭔 소리야. 갈증이 났다. 만원에 열두 개짜리 맥주 하나를 꺼내 벌컥벌컥 마신다. 잠깐. 주저하던 경험을 쓰려고 했잖아? 일단 취해본다.
주저하는 것도 다양한 방식이 있다고 느꼈다.
하얀 도화지를 갖게 된 네로는 그림 그리기를 주저한다.
조르주 : 근데, 왜 아무것도 안 그렸어? 그리고 싶어서 힘들게 구한 종이잖아. 빨리 그려봐, 나도 구경 좀 하게.
네로 : 그릴 수가 없어.
조르주 : 왜 그릴 수가 없는데?
네로 : 손이 움직이지 않아. 하얀 종이를 연필로 더럽히는 게 무서운 가봐.
조르주 : 난 네로의 마음을 알 것 같아. 나라도 그럴 거야.
4
네로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나도 그러니까.
5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미쓰꼬시 백화점 옥상 위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던 <날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사실 주인공 ‘나’는 옥상에서 뛰어내리지 않고 건물에서 내려와 회탁의 거리를 쏘다닌다. 고등학교 시절, 어렴풋이 기억나는 내용으로는 뛰어내리면서 날개가 솟구치길 바라는 주인공 ‘나’였는데, 다시 되짚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달린에 취한 주인공은 주저하고 그저 쏘다닌다. 나이 먹고 다시 바라본 문학 교과서 속 소설은 느낌이 남달랐다. 그때의 난 도대체 뭘 배웠나, 싶었다.
Q. 미쓰꼬시 백화점 옥상에서 화자인 주인공이 느꼈을 감정은 무엇인가?
1. 자괴감
2. 자신감
3. 자존감
4. 대한독립 만세
5. 난 너를 믿었던 만큼 난 내 친구를 믿었기에, 난 아무런 부담 없이 널 내 친구에게 소개시켜줬고…
주인공은 주저했고, 삶을 종결짓는데 주저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수능시험 문학 지문 속 문제를 저런 식으로 풀어내는 걸 보면, 난 정말 공부를 대충했음에 틀림없다. 재수를 해서 좀 더 목표와 가까운 곳에 갈까, 점수에 맞게 소신 지원할까, 고민하다가 적당히 적당한 곳에 입학했다.(물론 모교를 사랑한다. 나름 학교 홍보대사도 했다, 흠.) 1년을 좀 더 투자할까, 하고 주저하다가 더 이상 전전긍긍하기 싫어 타협했다. 1년간 더 고생해야 할 내 모습이 두려웠다. 네로가 느꼈던 주저함과는 결이 다르지만, 주저했던 기억이다.
(물론, 저 문제와 답은 뻘소리다.)
6
술이 거나하게 취한, 휘영청 달 밝은 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궁상맞고 찌질하게 전 여자친구에게 ‘잘 지내’란 문자를 보내고, 머리가 깨질 듯이 뱅뱅 도는 아침에 폰을 집어던지며 후회했던 기억이 났다.(물론 폭신한 침대 위, 이불 뭉텅이에 던진다.) 차라리 주저할걸. 폰을 벽에다 던지지 않은 건 남은 할부금이 떠올라 주저한 거다. ‘주저함’ 대한 다양한 단상 중 하나다.
7
하기 불편한 말, 송구한 말은 타이밍을 놓치기 일쑤였다. 미안한 마음에 주저하다 끝내 전하지 못한 말이 많다.
8
고맙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9
그럴 때 필요한 주문이 있다.
케세라세라. 케세라세라
(Quesera sera : 될 대로 돼라, 어떻게든 되겠지.)
네로는 아로아와 파트라슈와 신나게 뛰어 논다. 헥헥거리는 파트라슈를 보며 네로는 흰 도화지를 찾는다.
아로아 : 네로! 뭐하게?
네로: (슥슥, 슥슥)
네로는 귀하게 구한 흰 도화지 위에 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연필을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로아와 파트라슈와 뒷동산을 신나게 뛰어논 뒤, 평소의 자신으로 돌아온다. 네로는 도화지에 손을 뻗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흰 도화지 위, 네로가 그린 첫 그림은 파트라슈다.
10
머리가 깨질듯한 아침, 손을 뻗어 폰을 휘적인다. 통화 목록과 메시지 창을 확인한다. 늘 그렇듯 후회의 아침이다. 간 밤의 메시지에 대한 사과를 할까, 하다가 주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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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밤에 알콜에 담궜던 몸을 이끌고 출근하자마자 퇴직금 정산조회를 했다. 숫자를 확인하고, 누가 보기 전에 재빨리 창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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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지하철 입구에 빨간 조끼를 입고 ‘빅이슈’를 파는 아저씨가 보였다. 한 권 사야지, 라고 생각했으나 걸음의 속도에 붙은 관성을 차마 이겨내지 못했다. 그러고보니 현금이 없다. 누나 가슴에 삼천원쯤은 있는거잖아요!*, 라는 드라마 대사를 마음에 새겼다. 오천원 한 장쯤은 챙겨야겠다.
*원래 대사이거다. ‘누구나 가슴에 상처 하나쯤은 있는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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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픈의 상황은 내가 다 겪었으니, 이 글을 보는 분들은 그저 웃어넘기며 주저하지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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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문장을 적는데 주저했다. 짦은 문장, 문단, 단어로 이뤄진 짧은 심상으로 창백한 화면을 채웠다.
이렇게 ‘주저함’ 리스트에 한 꼭지 추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