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란다스의 개 다시 보는 남자 #12
대학생 시절 매주 월요일,
등교 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학생회관 앞에 쌓여있던 <대학내일>을 챙기는 일이었다. 무가지 주간지인 <대학내일>은 무료로 가져가는 매거진임에도 불구하고 콘텐츠와 각종 꿀팁들은 고퀄리티였다. 게다가 커버는 웬만한 코스모폴리탄, 엘르 표지 모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이쁘고 멋진 대학생으로 장식되어, 맥도날드 해피밀 장난감 모으듯 매거진을 소장하는 맛도 있었다. 그렇게 애정 하던 매거진이었지만 졸업하고 눈에서 멀어지니 기억에서도 먼지가 뿌옇게 앉았다. 이름조차 흐릿하게 기억에 남아 있던 때였다.
홍보팀 동기 : <대학내일>에서 우리 회사 임직원이 대학생 고민 상담해주는 코너가 있는데 써 볼래?
나 : 응? 응.
몸 안쪽 빠른 볼에 나도 모르게 배트를 휘두르듯 대답했다. 스트라이크다. 메일이 도착했다.
Q :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라는 게 정말 존재할까요? 있다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보통의 보람을 초월하는 무언가 일까요? 주변의 말에 쉽게 흔들리는 성격은 아니지만 명확한 꿈이 없기에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과, 대단한 열정은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열정적이지 못하다는 게 나쁜 일 일까요?
- D대 중어중문학 김oo
질문이 묵직한데?
순간, 내가 답 해줄 수 있는 깜냥이 되나 싶었다.
네로 할아버지 : 표정이 왜 그러니. 걱정거리라도 있는 게야?
네로 : (고개를 저으며) 음? 음.
네로 할아버지 : 그래?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었는데.
네로 : 화가 아저씨를 쳐다본 것뿐이에요. 화가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메일을 받은 주말,
텅 빈 모니터에 빈 커서만 몇 시간째 깜박였다. 대학 시절 무슨 생각을 하고 지냈지, 라고 생각하며 때아닌 과거 회상에 열중했다. 의미없는 커피만 몇 잔 째다. 학교 앞에서 궁상맞게 자취하며 중간고사를 망치고 돌아와서, 난 뭐 먹고 살 수 있을까, 고민하던 때의 나를 불러왔다. 고향을 떠올리는 전쟁영화 군인의 회상씬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 쓴 치약 억지로 짜내듯 누르고 눌러 활자를 옮겨 적었다.
A : 답을 찾기 어렵다면 질문을 바꿔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과연 ‘열정’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나무늘보가 100미터를 열심히 느리게 가는 것과, 토끼가 100미터를 대충 뛰어가는 것을 열정으로 비교할 수 있을까요? 좋고 나쁘다는 건 누가 결정하는 걸까요?
각자 느끼는 ‘열정’과 ‘보람’의 정의는 다릅니다. 그러니 ‘가슴 뛰게 하는 일’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에 흔들리기보다, 고민하게 만든 것들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내려보고 그것에 따라 무언가를 시도해보는 거지요. 저도 같은 고민을 한 적 있습니다.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뭔지 스스로에게 한참 동안 질문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지난 시간 동안 내가 재밌게 했던 일과 즐겁게 무언가를 했던 경험들을 곰곰이 떠올려보고, 그 경험들을 상기시켜줄 수 있는 비슷한 일들을 찾아서 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처럼 ‘가슴 뛰게 하는 일’을 하고 있게 되더라고요.
보통의 보람을 초월하는 무언가를 찾기보다, 본인이 했을 때 작은 성취감이라도 얻을 수 있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꿈이 조금 더 뚜렷해질 것 같습니다. 그럼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덜 혼란스러워지는 시간이 오겠죠? 열정적이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나 자신이 즐겁고 흥미롭게 느끼는 일을 찾고, 작게나마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대학내일 삼성그룹 특별판, 1:1 청춘 상담소 중>
상담 내용에 ‘가슴 뛰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적었는데,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었을까. 아니, 내가 나한테 해야 하는 말 같았다. 메일을 보내고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있었다.
한기가 도는 것 같아 정신을 차려보니 열어놓은 창문으로 찬공기가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밖은 어둑해져 있었다. 방바닥이 차갑다. 창문을 닫고 보일러 온도를 높였다. 일어서서 텅 빈 방안을 바라봤는데, 한 때 후끈했던 열정이 식은 방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기분이 들었다.
네로는 화가 아저씨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에 자신을 투영한다. 나무판자와 바닥에 그림을 그리곤 했던 네로는 화가의 꿈을 품기 시작한다.
책장 옆에 쌓아둔 먼지 쌓인 <대학내일> 꾸러미 먼지를 털어냈다. 대학생이던 당시 하고 싶던 대외활동과 공모전 소식들이 페이지마다 현재 진행형으로 적혀있다. 문득, 나는 어떤 시간에 살고 있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과거완료 시제화 되어가는 나의 30대 시계를 현재시제, 현재 진행형으로 바꾸기 위해 가까운 서점으로 향했다. 자기계발 코너를 지나 인문학과 문학 쪽을 서성였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과 마음에 드는 표지, 그럴듯해 보이는 서평이 적힌 책 몇 권을 두둑이 들고 계산을 마쳤다. 그렇다. 나는
책을,
쓰고 싶었다.
그룹 기자를 함께 하던 형, 누나들이 책을 내는 모습에 가슴이 뛰었던 때가 떠올랐다. 현업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하고 싶은 작업을 하는 모습에 기분이 몽글몽글했던 기억이 스쳤다.
대학생 고민상담 문장을 쓰다가, 내 고민 자문자답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좀 웃겼다. 책을 들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괜시리 마음이 두둑했다. 아직 뭐 한 것 하나도 없는데, 마음만은 출간 작가였다.
그나저나, 어디 보자. 난 뭘 쓸 수 있지? 뭘 써야 되지? 대책 없지만 빈 종이에 이것저것 적어봤다. 바닥에 큰 종이를 넓게 펴고 수성 싸인펜으로 초등학생 때 마인드 맵 그리듯 아이디어 가지를 쳤다. 패션 회사에 다니니까 옷 관련 키워드를 바닥에 뿌렸고, 그동안 좋아했던 책과 문학 작품을 잔가지 쳤다. 바닥에 널브러뜨린 종이가 잡다한 키워드로 꽉 찼고, 주말 저녁도 꽉 차게 썼다. 내일이 월요일이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등을 둥글게 말고 방바닥에 앉아 키워드를 적다가, 손바닥을 종이 위에 얹어봤다. 종이가 뜨끈하다.
차게 식었던 방바닥은 뜨끈하게 데워져 있었다. 기분 좋은 온도다. 오늘은 잠이 잘 오겠지?
불을 끄고 누워,
새삼 고민 상담 질문을 던진 그 대학생에게 고마웠다. 혹시 만나면 커피라도 한 잔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잠들었다.
Ps. 덕분에 브런치북 수상작 <옷장에 책꽂기> 잘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