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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호 Feb 15. 2018

주름의 다른 의미, 이세이 미야케와 <은교>_1

움직이는 조각, 이세이 미야케

주름의 의미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 《은교》, 시인의 노트; 범죄, 문학동네

<사진, 영화 '은교'의 이적요 역을 맡은 박해일>


이적요에게 주름은 욕망을 제한하는 바리케이드다.

《은교》에서 70대 시인 이적요는 10대 고등학생 은교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된다. 이적요는 사랑의 발화와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끝내 자신의 주름(나이) 속에 감정을 숨겨 놓는다.


주름은 인체 노화의 흔적이다. 탄력이 떨어져 피부가 접혀 생긴 잔줄은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노년의 사람을 은유한다. 이적요는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가 말한 '마음은 몸과 무관하게 움직일 수 없다.'라는 명제를 거부하려 했다. 하지만 나이듦은 결국 이적요의 욕망을 제한하는 장벽이 된다.

《은교》에서 주름은 70대 시인의 감정과 욕망의 질주를 멈추게 하지만 옷의 주름은 다르다. 옷의 주름은 옷과 인체에 일정한 공간을 부여해 조형성을 극대화하고, 신체 움직임을 자유롭게 한다. 노화의 주름과 달리 몸을 가볍게 젊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옷의 주름은 두 가지로 나뉜다. 인위적으로 가공해 만든 주름과 옷감이 활동에 의해 자연스레 생기는 주름이다. 전자의 주름은 몸의 자율성 부여하고, 후자는 인간의 노화와 닮은 옷의 구겨짐이다.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Issey Miyake는 주름의 밝은 면을 바라봤다. 그는 천과 육체와의 교감이라는 관점에서 주름으로 복식 조형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자신만의 패션 세계를 만들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1세대 디자이너인 그의 브랜드 스토리와 소설 《은교》를 통해 주름의 다른 의미를 찾아봤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옷장에 있던 수백 벌의 검은 터틀넥 브랜드, 바로 일본 대표 명품 브랜드 이세이 미야케의 이야기다.



소재의 건축가


“나는 옷의 절반만 만든다. 사람들이 내 옷을 입고 움직였을 때 비로소 내 옷이 완성된다”
- 이세이 미야케Issey Miyake


이세이 미야케(1938 ~ )는 일본의 대표 패션 디자이너로, 소재의 건축가로 불리며 ‘그가 표현한 의상은 움직이는 조각이다.’라는 찬사가 따라온다. 이세이 미야케는 요지 야마모토, 꼼데 가르송Comme des Garcons의 레이 가와쿠보와 함께 1980년대 서부터 파리 패션위크에서 활약하며 일본 패션의 세계화를 이끈 1세대 디자이너로 꼽힌다. 그는 전통적인 일본식 디자인과 하이테크 소재를 결합해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다. 특히 플리츠Pleats(주름) 스타일의 옷을 선보여 2차원의 평평한 직물을 3차원 조각적 형태로 변형시켜 주목을 받고, 이를 통해 이세이 미야케는 세계적 디자이너 반열에 오르게 된다.


<사진, 이세이 미야케>


1938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이세이 미야케는 타마 예술대학 Tama Art University 도안과에 입학한다. 2학년 때 문화복장학원 콘테스트 입상을 계기로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가지게 되고, 파리 의상조합학교에서 공부한다. 졸업 후 1966년 프랑스 브랜드 기 라로쉬Guy Laroche에서 2년간 수석 디자이너, 1968년 지방시Givenchy에서 2년간 어시스턴트 디자이너로 일한다.


1971년에 뉴욕에서 첫 번째 컬렉션을 발표하며, 뉴욕 블루밍데일 백화점Bloomingdale에 본인 이름을 내건 매장을 오픈한다. 1973년 파리 패션위크에 진출한 이세이 미야케는 아시아 브랜드 최초로 프랑스 엘르Elle 매거진 표지를 장식하며 일본에서 가장 큰 관객 동원력을 지닌 디자이너로 인정받는다. 천布과 육체와의 교감이라는 관점에서 복식의 가능성을 추구하며 1974년 일본 패션 편집인 클럽상, 1976년과 1984년 마이니치신문 패션상, 1979년 뉴욕 프레트 패션 디자인학교 상, 1984년에는 니만 마커스상 2부문과 미국 패션디자인협회 CFDA 상을 수상한다.  


<사진, 이세이 미야케의 다양한 브랜드 라인>


이세이 미야케는 브랜드의 영역을 점점 넓혀 산하에 ‘이세이 미야케’를 포함해 11개의 브랜드를 전 세계 30여 개국, 250여 매장에서 전개하고 있다. 남성복, 여성복, 가방, 액세서리, 향수, 시계 등을 다루고 있는 브랜드 그룹은 ‘이세이 미야케’, ‘이세이 미야케 맨’, ‘플리츠 플리즈’, ‘옴므 플리스’, ‘하트’, ‘미 이세이 미야케’, ‘바오바오’, ‘132 5. 이세이 미야케’, ‘인-엘 이세이 미야케’, ‘이세이 미야케 퍼퓸’, ‘이세이 미야케 워치’로 세분화되어 각 영역에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한 장의 천A Piece of Cloth


보통 여자애, 에 불과했다. 이적요 시인이 본 경이로운 아름다움이란 은교로 부터나오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단지 젊음이 내쏘는 광채였던 것이다. 소녀는 ‘빛’이고, 시인은 늙었으니 ‘그림자’였다.
단지 그게 전부였다.   
-《은교》, Q변호사 4, 문학동네


은교는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이적요가 사랑한 은교는 특별히 외적인 아름다움의 매력을 뿜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적요가 욕망하고 사랑했던 건 17세 소녀 은교로 대표되는 영원한 젊음이었다. 주름진 시인은 어린 은교에게서 ‘빛’을 보지만, 타인의 시선에서는 그저 보통 여자애에 불과했다. 어린 소녀 은교라는 하나의 모티브가 소설을 끌고 가듯, 이세이 미야케도 한 장의 원단만으로 브랜드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1976년, 이세이 미야케는 한 장의 천A Piece ofCloth으로 옷을 만든다. 솔기와 여밈이 없는 단순한 정사각형으로 형태로, 한 장의 천만으로 인체를 완전히 감싸는 형태의 의상을 제작한다. 극도의 미니멀리즘 Minimalism을 지향한 이 의상은 화려한 오트쿠튀르를 지향하는 것이 아닌, 일본 전통 의상인 기모노의 특징을 가지고 가지고 있었다. 과감히 단순한 이 옷은 과거와 미래, 동양과 서양, 인체와 천이라는 양극을 이루는 요소의 접점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화려함만을 좇으려 했던 기존 패션계에 화두를 던졌다. 이후 A Piece of Cloth를 줄여 A-POC라 이름 짓고 한 장의 천으로 의복을 구성하는 실험적 의상을 꾸준히 선보인다. 1999년, 한 장의 천의 궁극적 완성형은 나타나게 된다.


<그림, 이세이 미야케 A-POC>


1999년에 선보인 A-POC 컬렉션은 하나의 긴 튜브 원단이 옷의 전부다. 가공된 원단을 가위로 자르기만 하면 드레스, 셔츠, 팬츠, 스커트 등이 완성되는 구조다. 이를 통해 디자이너와 입는 사람의 유동적 관계를 형성한다. 디자이너는 원단을 제작・생산하고, 착용자는 원하는 아이템에 따라 잘라내 입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한 장의 천으로 만든 옷은 원단의 낭비를 최소화, 봉제 과정이 없는 실용적인 옷은 미야케 패션 철학의 발현과정이었다. 입는 이의 취향까지 고려한 이 디자인은 단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디자인을 넘어 환경친화적이며 미래지향적 디자인으로 평가받게 된다.



주름으로 주름잡다, 플리츠 플리즈Pleats Please


세월 따라 근육이 많이 빠져 달아난 그녀의 허벅지는 주름살이 잘 잡히는 옷감처럼 자유자재로 구겨진다. (중략)
 하지만 근사하다. 젊은 육체와는 다른 겸손함, 아늑함, 푸근함이 있어 좋다.   
- 《은교》, 시인의 노트; 꿈, 호텔, 캘리포니아, 문학동네


이적요는 은교와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여든 살이 된 은교의 허벅지는 주름살이 잘 잡히는 옷감 같다는 이적요의 표현처럼, 늙은 그녀는 아늑하고 푸근하다. 현실에서 장벽이 되는 나이듦의 상징과 달리 꿈속에서는 주름은 달콤하게 묘사된다. 이세이 미야케가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플리츠 플리즈Pleats Please의 주름은 그 달콤함에 가깝다.


플리츠 Pleats는 의복에서 아코디언 주름상자 모양으로 잘게 모를 내어 잡는 주름이란 뜻이다. 브랜드 플리츠 플리즈는 플리츠라는 표현에 담긴 의미 그대로 모든 아이템은 주름져 있다.


<사진, 플리츠 플리즈>


1980년대 후반, 이세이 미야케는 자신의 일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전통적인 파리 패션의 세계관을 벗어나 자유로움을 추구했던 그였지만, 십수 년 동안 이뤄놓은 창작활동은 또 하나의 장벽이 되어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동시대의 소니 워크맨Walkman처럼 사람들의 생활 패턴을 바꿀만한 혁신을 통해 패션계를 이끌어가고 싶었다. 아름답고, 흥미로우면서 기능과 보관이 탁월한 옷을 구상하던 그는 주름진 소재, 플리츠를 찾게 된다.


특수 재작한 합성 섬유 폴리에스테르 원단에 30톤의 롤러 압력으로 주름을 찍어낸다. 필요한 원단의 2~3배 정도 사이즈를 먼저 재단 후 프레스에 압착시켜 바느질 없이 주름과 옷의 구조를 만들어 낸다. 이렇게 만들어낸 플리츠 원단은 가볍고 구김이 없어 활동성이 높고, 주름진 조형성을 인체에 적용해 아방가르드하면서 기하학적인 형태가 된다. 개선문에서부터 뻗어나가는 방사형 도로처럼 주름진 옷의 미감은 유연하고 수려한 자태를 보여준다.


1988년 소재 개발을 시작한 이세이 미야케는 1989년 컬렉션을 통해 일부 옷을 공개하고, 1993년 본격적인 상업 라인으로 분화해 브랜드 플리츠 플리즈를 론칭하게 된다. 그동안 바느질 선 없이 하나의 천으로 만든 옷은 컬렉션 런웨이에서만 봐왔던 형태였다. 하지만 이세이 미야케는 소재와 디자인 개발 통해 일반 매장에서도 고객들이 부담감 없이 살 수 있게 만들었다. 크고 느슨한 형태로 우아하고 자연스럽게 인체의 윤곽을 드러내게 한 미야케의 방식은 몸의 라인에 맞게 세부적으로 재단해 아름다움을 표현했던 기존의 서양 패션 명품 브랜드의 방식과 달랐다.


플리츠 플리즈의 주름은 몸매 관리가 쉽지 않은 중장년, 노년층 여성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다. 자신의 체형을 보완하면서, 구조적으로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옷을 찾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 주름wrinkled진 여성들에게 필요한 주름pleats이었다. 《은교》에서 이적요가 표현한 것처럼 주름살이 잘 잡히는 옷감은 아늑함과 푸근함이 있었다.



<계속>


주름의 다른 의미,  이세이 미야케와 <은교>_2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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