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사케라또
아이폰이 부르르 떤다. 모르는 번호다. 무시하려다 통화 버튼 꾸욱. 뭔가 다급한 연락일 것 같았다. 중저음의 아재가 말한다. "여기 커피 하나 보내주이소."
장난 지금 나랑 하냐. 어느 다방 사장님 연락처랑 헷갈린 모양이다. 일찍이 익힌 통화 예절대로 용건만 간단히. "번호를 잘못 누르셨나 보네요."
무더위 무릅쓰고 외출. 열탈진의 증상과 증후를 몸으로 복기하는데, 휴대폰이 징징댄다. 또 모르는 번호다. 받지 않으면 계속 괴롭힐 것 같았다. 낮익은 목소리가 말한다. "여기 불당동의 불당모텔인데요. 커피 하나만..."
아까 그 아재다.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다.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내 도끼눈이 고막에 선명하게 찍힌 모양이다. 그 모텔 위치 알면 불을 당장 내고도 남을 기세였으니... 내가 아는 불당동은 천안에 있는데, 손전화에 찍힌 지역번호는 053(물론 내가 잘못 들었겠지. 열탈진 증상 리스트에 '청력 감퇴'도 추가해야 한다).
다방에다 주문 똑바로 하고 싶으면 받을 사람 번호를 다르게 해야지, 전화 거는 수단만 바꾸는 건 무슨 수작인가. 그나저나 기묘한 일이다. 대구의 여관에서 대낮에 커피 시키는 아재가 어떻게 알았을까. 내 부업이 커피 배달인 걸.
마침 마눌누님 호출로 외출한 찰나였다. 분만 콜 받고 새벽에 침실을 빠져나간 김 원장은 수술과 외래 진료 넘나들며 줄기차게 달리고 있었다. 휴가 떠난 동료 몫까지 짊어지느라 심히 후달리는 상태. 입추 접어들어 무신(戊申)월. 심지어 병인(丙寅)일. 뱀띠 아내에게 인사신(寅巳申) 형살이 제대로 발동된 셈이다.
심히 지독한 하루의 살풀이엔 심히 달달한 커피가 제격이다. 아지트 앞 <카페 토리노>의 아이스 사이공 라떼를 진료실에 사식(私食)처럼 찔러 넣는다. 남은 하루가 우리 가장을 살살 다뤄주길 바라며.
병원 빠져나와 꼴리는 대로 걷는다. 끌리는 카페에 무작정 침투한다. 배달 커피 거래처 다각화 모색. 여백의 미 충만한 공간이 일단 맘에 든다. 한 자리 차지할 명분을 고른다. 테이블에 잔 나르는 주인장을 뽀얀 견공이 보좌한다. 뜻밖에 대만족. 에라 모르겠다 찍었는데, 딱 맞춘 수학문제 같은 곳이다.
이제껏 홀짝여본 사케라또랑 풍미가 사뭇 다르다. 카페에 붙이기엔 결코 가볍지 않은 이름. 거리 배회하던 열탈진 환자들이 그 이름에 낚여 궁금한 발걸음으로 내원한다. 스튜디오스러운 카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까 그 아재에게 또 연락이 온다면, 퀵서비스로 여기 커피 한 사발 보내주련다. 이제는 참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