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 출근한 차지 간호사가 나에게 선물을 건넸다. 지난 근무 때 조목조목 상세히 풀어준 팔자 상담에 대한 답례라면서. 루왁 커피. 사실 요새 난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수면의 질을 떨어트려서 멀리하다 보니 자연스레 끊게 됐다. 그래도 아주 감사히 베트남 드립 커피를 품었다. 무례하고 몰상식하고 배은망덕한 세상에서 이런 정겨운 교감은 참 귀하다.
더불어 스며든 느낌은 뭔가 쎄한 것이었다. 잠을 쫓고 열일해야 할 이벤트의 복선이랄까. 그렇다. (나날이 더 섬세해지는)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새벽 1시 반쯤 80대 어르신이 심정지로 실려왔다. 전날 밤 10시까진 멀쩡했던 남편의 심장이 뛰질 않는다는 걸 배우자께서 새벽 1시경에 알아차리셨다. 신고 받고 출동한 119 대원들이 20분 동안 심폐소생술을 했으나 심전도 리듬은 계속 PEA(무맥성 전기활동).
소생실에서 곧바로 심폐소생술을 이어갔다. 기관 삽관도 곧장 했다. 모니터에 흐르는 심전도 리듬은 줄곧 asystole(무수축)이었다. 2분마다 에피네프린을 투여하며 CPR을 시행한지 20분쯤 지났을 때, 어르신의 사타구니에서 맥박이 감지되었다. 아, ROSC! 자발 순환 회복 직후에 확인한 심전도는 자명하게 STEMI였다. 작년에 분당차병원에서 이 환자가 심근경색 스텐트 시술을 받았다고 보호자가 알려주셨다.
재빠르게 다음 처치들을 진행했다. 환자의 대사성 산증과 고칼륨혈증을 교정하고, 승압제를 투여하고, 벤틸레이터를 세팅했다. 인공호흡기 달고 환자 상태를 지켜보던 와중에 심실빈맥이 다섯 차례 발생하여 DC cardioversion을 즉각 시행했다. 심율동전환 후 아미오다론을 투여했다.
환자 상태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을 때, 뒤늦게 달려온 아드님에게 아버님의 상태를 알려드렸다. 추후 필요한 조치도 일러드렸다. 시술을 받은 분당차병원으로 이송하여 응급 인터벤션을 받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분당차병원 응급의료센터에 연락했다. 당직 중인 응급의학과 김 교수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적막한 새벽 3시 반에 이 막막한 고충을 함께 나눌 동료 의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순환기내과 당직 교수에게 문의한 후 수용 여부를 알려주겠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환자 한 명을 전원하는 일이, 사향고양이 똥에서 커피 원두를 골라내 로스팅하는 것만큼이나 까다로운 세상이라 마음을 비우고 회신을 기다렸다. 분당차병원이 여의치 않을 땐 서울과 수도권 모든 병원을 뒤져서 환자분 받아줄 곳을 발굴해야 했다. 다행히 플랜B를 돌릴 필요는 없었다. 기다리던 응답이 목이 빠지기 전에 당도했다. 필패할 수밖에 없는, 무지막지한 필수의료 패키지 세상에서 이런 정겨운 교감은 참 귀하다.
분당차병원으로 이송할 준비를 서둘렀다. 전원의뢰서를 쓰고 심전도 기록들을 동봉했다. 사설구급차를 수소문했는데, 약에 쓰려면 없는 개똥처럼 구할 수 없었다. 하여, 119 대원들에게 이송을 요청했다. 119 대원들은 의사의 동승을 요청했다. 그 어둑한 새벽에 의료원 응급의료센터에 있는 의사는 내가 유일했으므로, 내가 응급구조사와 함께 앰뷸런스에 탑승했다. 병원 입구에서 진료를 희망하던 복통 환자에겐 간곡히 양해를 구했다.
정말 오랜만에 구급차를 타봤다. 화학공장 폭파 사고로 심한 화상 입은 환자를 케어하며 베스티안 병원으로 이송했던 전공의 시절 이후 처음이다. 빠르게 달리는 앰뷸런스가 과속방지턱을 지날 땐, 월미도 디스코팡팡처럼 몸이 출렁였다. 그 와중에 환자의 바이탈 사인이 출렁이지 않길 바랐다. 산소포화도가 살짝 떨어지고, 맥박이 약간 느려지는 순간이 있었으나, 무사히 차병원에 당도하였다.
통화했던 김 교수님에게 환자 정보를 전하고, 바통을 이어받은 의료진들이 환자 케어하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워낙 변수가 많아서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순 없지만, 아무쪼록 이 어르신이 잘 깨어나길 염원하였다. 의료원 응급실로 돌아와 숨을 고르는데, 차지 간호사가 말을 건넸다. “수고하셨어요. 그래도 환자 살리니까 좋으시죠?” “네!”
바야흐로 경칩이다.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개구리처럼 그 어르신이 깨어났다는 소식이 들렸으면 좋겠다. 깊게 침잠한 의료현장과 심정지 상태인 의대 교육에서도 희소식이 들렸으면 좋겠다. 아직은 여전히 아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