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소에 갔다.
수은전지와 철로 된 옷걸이를 골라 계산대 구역 앞에 줄을 선다. 앞에는 아주머니 한분이 바구니 가득 물건을 채운채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요즘 다른 마트도 그렇지만 다이소는 거의 모두 셀프로 바코드를 직접 찍어가며 계산한다. 셀프 계산기가 모여있는 공간 앞에 한 줄로 서서 여러 대의 계산기 중 한대가 비워지면 차례대로 들어가서 계산을 한다. 이른바 '한 줄 서기'다.
지하철 화장실에서도 칸마다 줄을 서는 것이 아니라 입구 쪽에 한 줄로 서서 기다리다가 여러 곳 중 한자리가 나면 일렬로 선 줄에서 한 명씩 들어가는 '한 줄 서기'가 보편화된 것 같다. 운이 나쁘면 먼저 왔는데도 차례가 늦게 되는 '여러 줄 서기' 방식에 비해 합리적이다.
앞의 아주머니는 빈 계산대가 없나 하고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다. 드디어 한 자리가 날듯하다. 아주머니는 바닥에 둔 바구니를 집어 들고 빈자리로 갈 채비를 하고 있다. 이때, 갑자기 내 앞의 아주머니를 지나쳐서 또 다른 아주머니 한분이 '쌩'하고 지나가더니 그 빈자리를 차지한다. 주변의 눈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섬주섬 카드를 꺼내 기계에 꽂는다. 앞의 아주머니는 입술이 실룩실룩 거렸지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들었던 바구니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는다.
순간 '욱'하는 마음이 든 나는
"아주머니!!! 이쪽이 줄입니다. 한 줄 서기 몰라요?
매너 없이 왜 그러세요? 차례를 기다리셔야죠!"
그리고 새치기한 아주머니를 방관하다가, 그 아주머니가 계산을 하며 자꾸 오류를 일으키자 친절하게 도와주러 간 빨간 티셔츠의 다이소 직원에겐 이렇게 말한다.
"직원이라면 새치기하는 고객에게 차례를 지키라고 말씀을 하셔야죠! 모른 척 도와주는 건 무슨 태도입니까"
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 혼자 머릿속으로 위와 같은 쉐도우복싱을 하고 있던 거다. 하루 뒤, 나는 그때 왜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말을 하지 못했는지 생각해 본다.
'괜히 말 꺼내서 주변의 주목을 받고 싶지 않다'
'너무 큰 소리로 말하면, 이후 동네에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줄이 있는지 모르니 당당하고도 뻔뻔하게? 새치기를 했겠지. 내버려두자. 앞의 아주머니도 가만있는데 뭘 내가 나서나?'
이제와 생각하니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그 순간, 나는 정의롭지 못했다. 불의를 보고 '꾹' 참은 것이다. 이렇게 '꾹' 참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새치기를 했던 그 아주머니는 앞으로도 부주의하게, 또는 알고도 아무렇지 않게 새치기를 할 것이고. 그런 부조리함이 이득이라는 생각이 보편화되면 사회는 지옥이 될 것이다.
나는 왜 정의롭지 못했을까?
나는 왜 '욱'했지만 '꾹'참았을까?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다'
'이 또한 지나가리니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
'참을 인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
'나이가 이제 들었구나'
그러나 화낼 일에 화내지 않고, '욱'할 일에 '욱'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정의롭지 못한 자들이 이익을 얻는다면?
매번 '꾹' 참은 나는 그 정의롭지 못한 자들에게 '한표'를 준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이후로는 침착하고 차분한 말투로 새치기한 아주머니에게 말해야겠다.
"저... 사모님! 아마도 못 보신 모양이신데요. 뒤쪽에 줄이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급하시면 제 앞에 서시고요."
약간은 다르지만 일을 하면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스X크라는 차량의 외부세차 주문이 들어와 세차를 하고 왔는데 차주로부터 전화가 왔다.
"기사님! 유리창을 덜 닦으셨네요. 얼룩이 안 지워졌어요. 제가 물티슈로 닦아도 지워지는데..."
"아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차는 지금 아까 그 자리에 있나요? 제가 다시 가서 닦고 오겠습니다!"
스X크 차량은 세차요금이 가장 저렴하다. 게다가 외부세차만 하는 경우, 더 저렴해진다. 차주가 있는 지역을 오가는 기름값 정도의 수익이 남는다. 거의 본전이다. 그러나 내 실수라면 열 번이라도 가서 처리를 하고 와야 한다. 외부 유리를 닦으며 뭔가 덜 닦인다는 생각은 했었다. 몇 번이고 닦아도 남아있길래 세차로는 지울 수 없는 얼룩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것을 고객도 알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아무튼 다시 가서 확인하고 닦든지, 설명을 하든지 해야 한다.
'외부만 세차를 했으니
내부 유리창 쪽의 얼룩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는데?'
'유막이 오래되어 고착되면
유막제거 시공을 받아야 하는데?'
도착해서 살펴보니, 역시나 유리세정제를 써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다. 유막이 오래되어 유리 자체에 고착되어 있다. 일단 최선을 다해 다시 닦아내고, 주차장을 나오며 일이 있어 못 내려온다던 고객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고객은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바쁘니까, 있다가 차 확인하고 전화드릴게요"
두어 시간 뒤 전화가 왔다.
"정말 다시 다녀가신 거 맞아요? 얼룩이 그대로 있는데요?"
"그게 말입니다. 고객님..."
설명 따윈 듣지 않겠다는 듯이 고객은 내 말을 끊고, 다시 속사포처럼 이어서 말한다.
"아니? 제가 말이죠. 다시 오셔서 하신다니 별말씀은 안 하려 했는데, 기사님도 그렇고 기사님 회사를 위해서라도 한 말씀드려야겠네요. 물티슈로도 지워지는 얼룩을 못 지우신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 갑질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다른 차는 이렇게 닦지 마세요"
이쯤 되니 나도 순간 '욱'하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이제부터 내가 차가 오래되었다라거나, 유막이 끼어서 그렇다고 설명하는 말들은 고객에게는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변명이 될 게 뻔했다. 제대로 해명도 못한 채, 졸지에 유리창 하나 제대로 못 닦는 세차업자가 되고 말았다.
유막이 낀 얼룩은 물티슈로 닦으면 그 순간엔 닦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르고 나면 그 얼룩은 다시 나타난다. 차주는 마를 때까지 지켜보지는 않았을 테고, 마른 후 다시 차를 보면 얼룩이 남아있을 것이다. 물론 그 얼룩 자국이 본인이 물티슈로 닦은 바로 그 부위라는 생각은 못한다. 돈 주고 세차를 불렀는데 이 작자가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다.
처음 세차를 하면서 얼룩이 지워지지 않을 때, 바로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서 설명을 하지 못한 내 잘못이다. 이제 와서 설명을 한들, 감정이 상한 고객에게는 핑계와 변명으로만 들릴 것이다. 고민하다 나는 결국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아. 고객님 저는 갑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력이든 실수든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간 내서 체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또 '욱'을 '꾹'으로 눌러서 '싸움', '감정의 소용돌이', '소모적인 시간 낭비'를 회피했다.
비겁하게 '꾹' 참는 나를,
'욱' 하며 정의를 외치는 또 따른 내가
안쓰럽게 바라보며, 한 살 한 살 차곡차곡 나이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