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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차정리

재계약

by 양우정


너와 함께 생사고락을 한지도 57개월이 지났구나! 그동안 참 고생 많았다. 나도 나름대로 너를 위해 지난 57개월 동안 매월 229,900원을 현대캐피탈에게 주었다. 합치면 천삼백만 원 정도구나. 그렇게 시간과 돈이 쌓여 가는 줄도 모르고 바쁘게 하루하루 지내왔는데, 며칠 전 현대캐피탈에서 편지가 왔더구나.


편지는 흡사 최후 통첩장인 듯 뭔가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너와의 계약이 끝나가니까 앞으로 너와 어떻게 지낼지 정하라는 것이었지. 4년을 동고동락한 너를 매정하게 버릴지, 아니면 얼마간의 목돈을 내고 너를 완전히 내 것으로 할지, 그도 아니면 매월 내는 돈을 조금 깎아서 지금처럼 같이 지낼지를 확정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받을 편지였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구나. 만나면 반드시 헤어짐이 있다는 회자정리(너와의 이별은 회차정리가 되겠군)라더니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어떻게 할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동안 정이들대로 들었는데 약간의 목돈을 들여 너를 인수할까? 어차피 이 일을 계속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세 달에 한 번씩 와서 엔진오일을 갈아주던 현대캐피탈 서비스 기사가 말하길, 새 차로 리스를 하라더구나. 네가 이젠 좀 늙어서 앞으로는 여기저기 쑤시고 아파서 돈을 더 많이 달라고 할 거란다. 하지만 나는 너와 똑같지만 새로 만든 너를 만나서 다시 4년을 다시 할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어쩔 건가? 고민을 하다 보니 그동안 너와 지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너를 처음 만난 날 나는 정말 기뻤다. 깨끗하고 예쁘게 생긴 너는 크기마저 작아서 깨물어 주고 싶었다. 그렇게나 깜찍했던 너의 몸통에 300킬로그램의 스팀세차기를 넣었다. 공기를 뿜어대는 컴프레셔도 넣었지. 전기를 쓰기 위해 15킬로그램의 배터리도 두 개나 넣고, 그리곤 트렁크 쪽에는 여러 가지 화학약품과 타월이 정리되도록 선반도 짜서 넣었다. 여기저기 공간만 보이면 욱여넣어 미안했다.


미안했지만, 먹고살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렇게 변신한 너는 깜찍함과 유능함을 동시에 갖춘 만능 세차차량으로 탄생했다. 지난 4년간 푹푹 찌는 여름에도, 찬바람 몰아치는 엄동설한에도 너는 내 곁을 지켜주었다. 아무도 없는 지하 5층의 외로운 작업도 너는 지켜보았고, 꽉 들어찬 주차장에서 틈을 비집고 작업할 때에도 내 곁을 지켰다.


한 번은 시간 밀려 급한 마음에 함부로 후진을 하다가 너의 뒤통수를 기둥에 찧은 적도 있었지. 부딪치는 순간 들었던 ‘빠지직’ 하는 큰 소리에 나는 네가 크게 다쳤을 거라고 생각했다. 큰 사고를 쳤구나라고 생각했지만 뒤로 가서 살펴보니 너는 멀쩡하더군. 튼튼하기까지 하더라. 고맙다.


시동을 걸어 둔 채 편의점에 삼각 김밥을 사 오던 날은 잊을 수가 없다. 편의점에서 돌아와 너에게 돌아왔는데 문이 잠겼었지. 시동이 켜져 있는데 문이 잠겼던 거 기억나지? 차를 운행하며 처음 겪는 일이었다. 시동이 걸려있는데 차문이 잠기다니? 열쇠기사를 부르려고 했지만 휴대폰도 차 안에 있었고, 별 궁리를 다하다가 결국 택시 잡아타고 집에 가서 보조키를 들고 왔어. 잊지 못할 순간이지. 그 뒤로 운전석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스티커 붙였었지. 내용은 '키를 갖고 내려라'


어떤 날은 도로 한복판에서 너는 멈춰 섰다. 견인차를 불러서 정비소에 가야 했지. 정비소에서는 여차저차 너를 살피더니 수리를 해주었고, 내가 원인을 물으니 이런저런 이유인데 너와 네 형제들이 가진 공통의 고질적인 문제라더군. 아무튼 고속 주행이 아니라 신호 대기 중에 이런 일이 벌어져서 안전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지하주차장에 내려가서 너를 살펴본다. 남들 차 닦아주느라고 정작 너는 닦아준 적이 별로 없었다. 이기적 이게도 내가 필요한 기능에만 집착해 왔지. 찬찬히 살펴본 너의 몰골은 말이 아니구나. 베이지색 카펫재질이었던 너의 천장은 뒷자리에 자리 잡은 스팀기가 작동할 때 나오는 그을음으로 검은색으로 변했구나. 외부는 여기저기 그동안 열심히 일한 데 대한 훈장인 듯 생채기가 나 있다. 얼마나 타고 내렸는지 내가 앉은 좌석은 닳아 있다.


지난 4년간 친구보다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 내 곁에 있었던 너와 헤어지기엔 추억이 너무 많다. 결국엔 헤어지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지금은 아닌 것 같다. 가능한 시간까지 함께 하자꾸나. 1년씩 연장이 가능하다고 하니 우리의 '회차정리'는 1년 뒤로 미루자.

다시 1년간 함께할 나의 '레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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