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스펜스
"회사는 왜 그만두신 거예요?"
"긴 시간을 회사에 다녔지만,
오너에 실망하기도 하고... 그리고..."
"어디 가서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본인이 먹던 우물 아닙니까?"
예능으로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다큐가 되어버렸다.
4년 전에 만난 고객이었다.
그 당시 나는 그 고객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출장스팀세차 창업을 위해 본사에서 교육을 받고 현장에 투입된 지 3개월 차였었다. 방이동 근처 주택가에 있는 상가 앞에서 예약이 들어왔다.
검은색 팰리세이드였고, 그즈음의 나는 그 차가 너무도 거대해 보였었다. 본사에서 교육받은 대로 열심히 세차를 진행했다. 상가 1층은 공사 중이었고, 그 공사현장 앞에서 세차를 했다.
세차를 마치고 고객에게 전화를 하니
공사하는 1층 상가에서 나온다.
"뭐 잘하셨겠죠"
"..."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타월을 한 장 달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한다.
"차문이 닫히는 힌지 사이가 덜 닦였네요"
"운전석 바닥 엑셀 옆은 아예 안 닦였네요"
"트렁크 상단 물골도 안 닦였고..."
"아 이거 제가 세차비를 낼게 아니라 교육비를 받아야겠는데요?"
내 얼굴은 불타는 고구마가 되어있었다.
"세차가 취미셨나요"
"이 일 만만히 보면 큰코다칩니다. 진상이 얼마나 많은데..."
진상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뭘 모르면서 우기는 진상이 있다면, 이 고객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는 진상에 속했다.
'이 일 만만히 보면 큰코다친다?'
그제야 공사 중인 1층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XX디테일링]이라는 간판이 내려와 있고,
[참치 XX]라는 새 간판이 달려있다.
"제가 디테일링 삽을 10년 넘게 하고, 진상이 하도 많아 때려치우고 횟집으로 바꿨어요"
"이런 수준으로 세차하다 진상 제대로 걸리면 큰일 납니다"
세차는 끝났는데 이런 말을 30분 동안 들어야 했다.
속으로는 '그렇게 잘 알면 자기가 하지...'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회사는 왜 그만두셨어요"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이런 식으로 하다 진상 만나면 큰일 납니다."
"세차가 취미였나요"
"이 일은 차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오래 못해요"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4년 전 그때 그 고객의 말이다.
출장스팀세차 3개월 차였던 나는 단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이 고객은 가게에서 디테일링 샵을 10년 이상 운영했었다. 번데기도 이런 번데기가 없다. 고인 물을 제대로 만난 날이었다. 고객이 스승이구나... 참 돈주고도 못 배울 가르침을 얻었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너무너무 창피했다.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나는 실력도, 인성도 형편없는 놈이 되어있었다.
한 동안 그 지역에서 들어오는 예약은 받지 않았다. 그리고 4년이 흘렀다. 4년간 더한 진상, 더한 실수도 많이 했지만 그때의 기억은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인접 지역 다른 업체에서 출장 가서 세차를 하고 난 뒤, 다시 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말도 간간이 들려왔었다. 그 고객이 오늘 예약을 했다. 지금 나는 그 고객의 차를 세차하고 커피숍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아! 이런... 그 고객이구나'
'어쩌지...'
'나를 아직 기억할까?'
'머 그냥 하면 되지...'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고객이니까... 예약을 하면 가야 한다.
세차를 마쳤다.
"와 4년 동안 실력이 많이 올라왔네요"
"이제 점장님에게 정착해야겠어요"
나는 속으로
'4년을 세차했는데 이 정도도 못하면 바보 아닌가?'
'그래도 나한테 예약 안 했으면...'
하지만 예약이 들어오면 나는 또 군말 없이 갈 것이다.
왠지 모를 써스펜스가 느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