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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에 대하여

배려와 권리

by 양우정

여름이 지나갔습니다.

물론 지금도 일을 하면 땀이야 나지만, 폭포수 같던 땀지옥은 벗어났습니다. 분명 어렸을 적 여름도 더웠을 텐데, 한해 한해 나이를 먹을수록 더 더워지는 느낌입니다.


동네 횟집에 전어구이 현수막이 걸린 걸 보며, 가을이 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이 가을의 초입에 제가 운행하는 레이 차량의 에어컨이 고장 났습니다. 레이 차량에는 출장스팀세차에 필요한 모든 장비가 실려 있습니다. 차량이 사무실이자 점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어컨 바람이 나오지 않으면 여러 가지로 낭패입니다.

우선, 요이 땅! 하고 세차의 한 공정을 마치고 나면 운전석에 돌아와 에어컨 바람을 쐬며 땀을 식혀야 하는데 이게 안됩니다. 한 겨울에도 땀은 납니다. 하루에 세차를 4대를 한다면 총 12회는 운전석에 돌아와 잠깐씩 숨을 돌려야 하는 데, 그때마다 불편합니다. 또한 앞유리에 김이 서리면 에어컨을 전면 유리 방향으로 하여 지워야 하는 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에어컨이 고장 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두어 달 전에 좌회전, 우회전할 때마다 차량의 앞쪽에서 물이 좌우로 '촤르륵'하고 흐르는 소리가 났습니다. 바쁘기도 하고, 뭐 잡스러운 소리가 나는가 보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수석 바닥을 볼 일이 있었는데 맙소사!

조수석 바닥에 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습니다. 에어컨을 틀면 나오는 물은 호스를 통해 차 바닥으로 배출되어야 하는데 외부로 나가지 못하고 역류하여 내부로 흐르고 있었던 거지요. 좌우회전 할 때마다 들렸던 물 흐르는 소리는 실제로 에어컨 내부의 에바포레이터(냉매가 흘러서 지나는 공기를 차갑게 해주는 판) 아래에 물이 흐르는 소리였던 겁니다.


조수석 옆 바닥에 앉아서 에어컨에서 생긴 물을 배출해 주는 호스를 찾았습니다.

바닥과 연결하는 고리를 분리하고, 에어컨을 작동해 봅니다. 역시나 물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바늘로 호수 끝부분을 찔러서 막힌 부분을 뚫으니 콸콸콸 물이 쏟아집니다. 급히 차량의 바닥으로 이어지는 호스와 다시 연결해 줍니다.


물 흐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에어컨 작동도 이상이 없습니다.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난 며칠 전, 이젠 아예 에어컨 바람이 나오지 않습니다. 자동차 정비를 따로 배우진 않았지만 차량 에어컨 청소도 배웠고, 청소학원에서 벽걸이형, 천장형, 타워형 에어컨 청소를 배운 깜냥으로 머리를 굴려본 결과, 이번에는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상황으로 판단했습니다.


연휴가 끝난 토요일 오전에 정비센터를 찾아갔습니다.

점검 결과 블로우모터(바람을 일으키는 송풍기)가 망가졌다고 합니다. 아마도 두어 달 전, 물이 고여 있을 때, 블로우모터에 물이 들어간 모양입니다. 블로우모터의 교체 비용은 8만 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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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세차를 시작한 첫해에 첫 에바클리닝 작업을 했을 때가 떠오릅니다.

에바클리닝은 에어컨을 틀었을 때 악취가 나면 하는 시공입니다. 조수석 쪽에 앉았을 때 발등 위쪽에 블로우모터가 달려 있는데, 그 블로우 모터를 탈거하고 내시경 카메라를 에바포레이터까지 넣어서 살핍니다. 그리고 에바클리닝 장비를 에바포레이터까지 깊숙이 넣어 거기에 끼어있는 곰팡이(십중팔구는 곰팡이가 있습니다.)를 제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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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에바클리닝 주문은 외산차(BM-)가 들어왔었습니다.

그때는 완전 초보라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시공 후 에어컨 작동이 되지 않아 블로우모터를 교환해 주었더랬습니다. 그때 그 외산차의 블로우모터 금액은 46만 원이었습니다. 이렇게나 차이가 나다니... 물론 국산 경차지만 레이의 블로우모터는 8만 원에, 외산차는 46만 원에... 무려 여섯 배 차이가 납니다.


잘 되던 에어컨이 고장 나고 나서야 에어컨의 고마움을 새삼 느낍니다.

에어컨뿐이겠습니까. 평소 공기처럼 곁에 있던 존재들, 마치 저절로 생겨나 아무 대가 없이 내 곁에 머무른다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다가 불현듯 떠나고 나면, 그제야 당연하거나 저절로 되는 건 없다는 걸 절감합니다.


'배려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은 타인에게 할 게 아니라. 나에게 해야 하는 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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