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휴먼 디자인]16. 나를 아는 유익
난 휴먼 디자인에서 말하는 조건화(conditioning)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매일매일 느낀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무엇도 인식하지 못한 채 그 강력한 조건화에 얼마나 깊이 빠져있는지도 매일매일 본다. 어쩌면 그 조건화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매일 조건화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항상 그것에 빠져있는 나를 또한 보기 때문이다.
그래도 요즘 난 내가 아닌 것들에 조금씩 에너지를 쏟지 않고 덜어내는 방식으로 조금이나마 나를 지켜가고 있다. 여전히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여태껏 쓸데없는 곳에 사용돼 온 에너지 쓰임새를 아주 조금씩 조율해가고 있다. 이전보다 살아가는 느낌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이것의 출발은 휴먼 디자인이 말하는 나는 도대체 어떻게 작동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기준이었다. 즉 나에 대해 알아가면서 3가지가 측면에서 조금은 편해질 수 있는 유익을 얻은듯 하다.
첫째, 타입 측면이다. 여전히 내 타입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아닌 모습을 조금씩 덜어내고 있다
내 타입은 매니페스터다. 닫혀있고 쫓아내는 아우라다. 일상에서 나의 가장 큰 비자아 경향성은 과도한 친절이었다. 조화라는 가치가 하나의 미덕이 되는 사회에서 난 늘 사람들과 친근하려 애썼고, 어울리려 애썼고, 늘 배려하기에 바빴다. 그런 내 모습은 때때로 좋은 사람이라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남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면 받을수록 정작 나 자신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노력을 하면 할수록 왜인지 내 몸은 지쳐만 갔고 무기력해졌다.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가려는 처절한 노력이 나로부터 나를 점점 멀어지게 했다. 얼마나 멀리 나로부터 멀어졌는지 가늠하는 것이 불가능할 지경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배려, 친절, 조화는 좋은 덕목임이 맞다. 그 덕목은 분명 귀한 가치다. 여기서는 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제너레이터 타입이 태생적으로 갖고 태어난 열려있고 감싸는 아우라가 발현할 수 있는 열려있고 따뜻하게 포용하는 어울림이 불가능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제는 이전처럼 과도하게 웃지도, 과도하게 다가가서 친절을 베풀거나, 과도하게 어울리려 애쓰지 않는다. 그런 일에 더 이상 에너지를 소모하며 탈진하지 않는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휴식한다.
여전히 난 내가 아닌 것들에 에너지를 쓰고 있다. 무의식적으로라도 충분히 내 모습은 그럴 것이다. 또한 매니페스터로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여전히 잘 모르고 있다. 그 지향점이 어떤 모습 인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난 조금씩 내가 아닌 모습들을 덜어내며 조금씩 편해지고 있다.
둘째, 내부 권위 측면이다. 여전히 남들의 부정적 평가는 두렵다. 하지만 내면은 괜찮다.
난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잘 마시지도 못한다. 살면서 술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거의 없는 태생적으로 술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런 내게 사회생활이라는 이유로 밤늦은 시각까지 술잔을 깨작거리며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일은 고문 그 자체였다. 그런 게 다 사회생활이라는 뿌리 깊은 관념 탓에 난 그런 고문과도 같은 시간을 너무 오랫동안 지내왔다.
지금 일하는 회사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임을 단호하게 밝혔다. 일명 알코올 쓰레기를 자처했다. 이 보수적인 조직문화에서 나름 큰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 내게 온 피드백은 예상대로였다.
'세네' '' 치명적 결함이네' '그래도 술 한 잔은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막내도 몇 시까지 있었는데 먼저 집에 갔네'
긍정적 반응은 없었다. 예전엔 그런 부정적 평가가 두려워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면에서 술자리에 대한 나만의 어떤 명료한 기준이 세워지고 나니 지금은 알아서 사이다를 시켜주는 사람들도 간혹 생겼다. 그리고 적당한 시간이 되면 난 회식자리를 빠져나온다. 그런 날 보며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면은 매우 만족스럽다.
여전히 난 남들의 부정적 평가가 두렵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내면은 고요하다. '그건 네 생각이고'라고 치부하면 그뿐이다.
셋째, 감정 파동의 메커니즘 측면이다. 여전히 감정 파동은 싫다. 그러나 죄책감과 비난이 줄어들었다.
난 매우 그리고 자주 감정이 바닥을 친다. 좋은 기분 또는 느낌이 드는 날을 모두 합쳐도 고작 한 달에 하루 이틀 정도뿐인듯하다. 지옥 같은 느낌이 들 때는 여전히 힘들다. 정말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탓하지 않는다. 자책하지 않는다. 이전처럼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나는 왜 저들처럼 밝고 쾌활하지 못한가'하는 죄책감과 비난에 내 감정적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는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아질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죄책감. 비난 등에 더 이상의 많은 감정적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게 되면서, 그러한 에너지가 상상 그 이상으로 나를 얼마나 잡아끌어 스스로를 소진케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무엇이든 자신만의 기준이 없고 그 기준이 내면에서 선명하지 않을수록 주변 상황에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앞으로도 다양한 상황에서 '너는 어떠어떠해야 한다'라는 사회의 압력은 여전히 거셀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회적 시선과 평가가 자신을 스스로 고문할 이유가 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점점 깨닫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맞추면 맞출수록 오히려 정작 지켜야 할 자신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고문을 겪게 될 테니.
이미 차고도 넘치게 그 고문들을 겪고 나서야, 이제야 내가 아닌 것들은 쿨하게 날려 보내고, 메커니즘상 어쩔 수 없는 한계는 쿨하게 수용하는 것을 시작하게 되는 것 같다.
이 과정에서 편해지는 건 상대방이 아니라 나다. 내 에너지다. 그리고 이것은 살아가는 느낌 자체를 실직적으로 바꾼다.
에너지는 추상적이지 않다. 실제적이다.
나에게 맞게 에너지를 쓰면서, 이 숨 막히는 세상에서 실제로 숨통을 트며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