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부짖는 황소 1, 화가 이중섭

by 남궁인숙


원장힐링연수를 통해서 이창용 강사에 의해 화가 이중섭 부부의 국제결혼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중섭 화가는 일본에서 학교를 다닐 때 일본인, 마사코를 만나 서로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숫기가 없었던 두 사람은 학교에서 처음 만난 이후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하고 얼굴만 붉히자 주변에서 친구들이 연결을 시켜준다.

누가 봐도 둘이 좋아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 둘의 모습이 답답해 보여서 초등학교 동창생인 김명기 화백이 친구들과 함께 주선을 했다고 하였다.

둘을 생일 파티에 초대하여 약속 장소에 나오게 하였는데 그곳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둘만 있었다는 일화였다.

그래서 둘은 술 한잔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었고 그날부터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마사코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일이 있었다.

그래서 발가락을 다치자 이중섭 화가는 여자친구를 둘러업고 자기 자취방으로 데리고 가서 발가락을 치료해 주었다.

발가락을 치료하면서 가만히 들여다보니 여자친구의 발가락이 너무 귀엽고 예뻐 보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이중섭 화가는 여자친구에게 '발가락 군'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게 된다.

이후에 이중섭 화가는 가족들과 헤어지게 되고, 가족들이 너무나도 그리워 300통이 넘는 편지를 쓰게 된다.

편지에 다음과 같은 특이한 내용이 들어있었다.


"당신의 발가락이 너무나도 그리워요.

당신의 발가락에 입을 맞추고 싶어요.

하루 종일 당신의 발가락을 입에 머금고 싶어요." 이런 표현들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앞 뒤의 내용 모르면 그 편지만 보고서 이중섭 화가는 왜 이렇게 발가락에 집착하냐고 의아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도쿄에서 연애하는 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그림엽서를 그려서 여자친구인 마사코에게 보내기 시작한다.

다행히도 이때 보냈던 그림엽서들이 모두 일본에 보관되어 있었다.

마사코가 계속 보관하고 있었고 조선으로 시집올 때 일본에 두고 갔었기에 전쟁통에서도 분실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중섭 화가 와 이남덕 여사


그래서 그림엽서들은 이중섭 화가의 고향인 북한에 처음부터 간 적이 없었다.

이 엽서는 다 보관되어 있어서 이중섭 화가가 1940년대에 어떤 스타일로 그림을 그렸었는지 우리가 추정해 볼 수 있는 굉장히 귀한 자료로 남아있다.

그때 당시 발가락을 치료했던 그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그렸던 그림이라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엽서가 아래 그림이다.



이중섭 화가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나름의 실력도, 커리어도 잘 쌓았, 사랑하는 여자친구도 만나서 예쁜 사랑도 할 만큼 모든 것이 완벽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때가 1940년대,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거나 완벽하지는 않았었다.

1941년 일본은 진주만을 폭격하였, 본격적인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미국을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은 점점 수세에 몰리고, 당장 전쟁을 치를 인적자본은 부족하였다.

그래서 당시 일본에서는 학도병의 징집이 시작되었다.

이중섭 화가는 우리한테나 대단한 화가였지 일본인들 눈에는 그냥 조선인일 뿐이었다.

다시 말해 당장 이중섭 화가가 전쟁터에 끌려가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막내아들이 당장 전쟁터에 끌려갈 것 같으니 고향에서는 이중섭 화가를 귀국하게 하였다.

이중섭 화가는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여자친구를 일본에 두고, 징용을 피해서, 폭격을 피해서 귀국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잠깐의 이별을 하게 되었다.


처음 1년 정도는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일 년쯤 지나고부터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던 연락선마저도 침몰해 버렸고, 더 이상 편지조차도 주고받기 힘든 지경에 이른다.

3개월 이상 여자친구와 연락도 끊겨버린다.


그때 당시 일본 도쿄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매일 폭격이 쏟아졌고, 수만 명이 죽어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연락이 끊겨버린 여자친구, 마사코는 조선에 있는 이중섭 화가가 결혼이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또한 이중섭 화가도 내 여자친구가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내 여자친구가 죽었을지도 모르겠다.'등의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 이중섭 화가의 집안에서는 막내아들에게 일본인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중섭 화가의 집안은 독립자금을 대던 대단한 집안이었다.

그런 집안에 일본인 며느리가 가당키나 했을까?

처음 이중섭 화가의 어머니께서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일본인 며느리를 볼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막내아들이 너무 좋아하니까 차마 헤어지라고 말을 못 하고 있었는데 3개월 동안 연락이 끊긴 것을 보니 이 아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니 그만 잊어버리고 집에서 정해주는 여자랑 결혼하라면서 혼처도 정해버리고, 결혼 날짜까지 잡아버렸다.

마사코는 죽지 않았고 그냥 편지를 써서 조선으로 보내도 계속 반송이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연락받았던 정보의 내용이 '연락이 계속되지 않으면 집에서 혼사를 추진하려고 함'이라는 내용이었다.

마사코는 편지를 써봐야 어차피 조선으로 안 가는 상황이니 조선에서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마사코는 만약 이중섭 화가가 다른 여자랑 결혼해 버린다면 훗날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 해도 다른 여자랑 이미 결혼을 해버렸다면 우리의 인연은 여기서 끝일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이때 마사코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어차피 편지 써봐야 안 가니까 내가 조선으로 직접 건너가야겠다고 결심을 한다.


조선으로 가는 여정은 목숨을 거는 여정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매일매일 폭격이 쏟아지고 있었고,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시모노세키 항에서 배를 타야 되는데 그 당시 도쿄에서 시모노세키 항까지 가는 모든 도로와 철도는 모두 끊겼었다.

기록에 따르면 마사코는 도쿄에서 시모노세키 항까지 가는 데만 꼬박 한 달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그렇게 폭격을 피해 겨우 시모노세키 항에 도착하여 배를 타려고 보니까 마사코가 타려고 했던 배가 바로 어제 침몰해 버렸다.


마사코는 1945년 5월에 배를 타고 조선으로 건너온 기록이 정확하게 담겨 있다.

1945년 5월 일본과 조선을 오가던 상선이 총 32척이었는데 그해 5월 한 달 기간 동안에 그중 28척이 침몰한다.

일본에서 조선까지 가기 위해 배를 타면 침몰될 확률이 90%였다.

다시 말해 90%의 확률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사코는 그것을 알고도 배를 탔다고 한다.

이게 바로 사랑의 힘이었다!!

인터뷰에서 무슨 용기로 그 배를 탈 결심을 했냐고 물으니 그녀는 "그 배를 타지 않으면 이중섭 씨를 못 볼 것 같았고, 그리고 중섭 씨를 보지 못하는 삶이라면 죽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라고 답하였다.

그래서 어차피 죽은 목숨이라면 '시도라도 해보자'라는 심정으로 마사코는 목숨을 걸고 배를 타고서 조선으로 건너오게 다.

마사코와 이중섭 화가는 1년 6개월 만에 재회를 하였다.


처음 이중섭 화가의 어머니는 절대 일본인 며느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완강한 입장이었으나 일본에서 저렇게 어린 여자가 내 아들을 만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조선까지 온 것에 감동하여 결혼을 허락하였다.


참고로 마사코의 집안도 일본에서는 대단한 집안이었다.

마사코 아버지는 미스이 그룹의 사장이었다.

이 둘은 1945년 5월 20일 원산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덕이 많은 여자가 나에게 찾아왔소'라는 의미로 '이 남덕'이라는 한국이름을 붙여주었다.

여기까지는 너무너무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영화 같고 너무나 행복한 스토리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중섭 화가에게 있어서 행복은 딱 여기까지였다.

이후로는 온통 고통과 절망만으로 가득 차게 된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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