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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새작가 Mar 14. 2024

남한산성 행궁

(Royal Ancestral Shrine) 왕실조상신위

 날이 좋아서 무작정 드라이브를 나섰다.

남쪽으로 하염없이 운전해 가다가 정해진 장소 없이 운전하는 일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다 보니 이정표에 '남한산성'이라고 쓰여있었다.

바로 티맵으로 '남한산성'을 찍고 목표를 정했다.

목표지점이 생기막연했던 드라이브 길에 안정감을 느끼고, 훨씬 운전이 편해졌다.

나는 명확한 J유형이다.

무계획의 삶을 사는 것은 막연한 미래로 떠나는 여행과도 같은 것이다.

절대로 P유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고불고불한 노고단 산길을 오르는 것 같은 기분으로 운전해서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들어서니 '남한산성'의 성곽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남한산성은 경기도의 대표적인 도립공원으로서 역사적인 가치와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은 장소였다.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를 통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2014년에 등재된 곳이다.


 남한산성 주차장에 도착하여 차를 세우고 났더니 예고도 없었던 비가 후드득 떨어졌다.

이런 비쯤은 맞고 다녀도 될 것 같아서 우산을 받지 않고 행궁 쪽으로 걸어갔다.

산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행궁으로 들어가기보다는 둘레길 표지판이 세워진 방향을 선택하여 걸어갔을 것 같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에 수도였던 한양을 지키던 성곽으로 북한산성과 함께 2대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에 남한산성행궁은 '광주행궁'으로 불렸다.

1624년(인조 2년) 16대 임금이었던 인조 때 착공하여 2년 후인 1626년에 완공하였다.

이후에 소실되었으나 문화재청에서 2011년에 복원하여 일반인에게 공개하였다.

행궁 입구에 도착하니 관람료 2천 원을 받는데 경기도민은 무료입장이라면서 경기도민이냐고 매표소 직원이 물었다.

관람료를 내고 입장권을 받았다.

날이 흐려서인지 행궁 내부는 인적이 드물었다.

조용한 행궁 내부를 천천히 둘러볼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병자호란 때 인조는 청나라 홍타이지 군대를 상대로 농성을 벌였으나 당시에 이곳 남한산성은 산세가 험준해서 전쟁 물자와 식량 등을 수송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병력도 부족하였고, 서양식 화포에 능가하는 무기도 없었기에 한 달 이상을 버텼지만 결국 식량고갈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지리적으로 볼 때 세종대왕과 효종의 영릉과 인접해 있는 곳으로 숙종과 영조 그리고 정조 등이 참배를 하기 위해 이곳에서 머무르기도 했으며, 지역 탐방을 나서면서 잠시 지낼 수 있었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조선 국왕들이 만든 개인 시문들을 모아 수록한 열성어제(列聖御製) 시문집 내용에 따르면 숙종은 남한산성 행궁에 머물면서 병자호란을 한스럽게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고 전한다.


남한산성 행궁에 있다가 감회가 일다.

천연의 금탄성지가 왕기를 진무하고,
봉황 날고 용이 서려 대궐을 옹위하네.
군영에 달이 밝아 딱따기 소리 들려오고,
행궁에 바람 빨라 피리 소리 드무네.
험천에 비가 내려 마음이 아프고,
쌍령에 구름 짙어 슬픔이 더해지네.
조정 계책 좋지 않아 진실로 한스러우니,
충신과 의사가 옷자락에 눈물 적셨네.


* 험천 - 병자호란 중이었던 1636년 12월 29일에 있었던 전투

* 쌍령 - 병자호란 중 조선군이 패배한 전투가 있었던 곳.


 조선의 임금님들은 작가나 시인처럼 글에도 능통했었나 보다.

나라를 사랑하는 충정의 마음과 백성을 사랑하는 진솔한 마음을 함축적인 글로 참 잘도 표현하였다.

전쟁 이후에 남한산성은 천주교인들의 순교지가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이후로 남한산성의 행군은 방화터만 남아있었는데 1925년도 대홍수가 나면서 산성은 매몰되어 거의 실되었다.

경기도에서 1975년부터 성벽의 복원을 시작하였으며, 2002년부터 내행전 복원을 계기로 2014년에 기타 대부분의 건물까지 복원작업을 끝마치게 된다.



 행궁 내부는 상궐과 하궐로 나뉘어 있었다.

임금의 처소였던 내행전, 광주부에서 제일 높은 책임자가 업무를 보던 좌승당, 왕과 신하가 업무를 보는 외행전, 문서를 보관하는 일장각 등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었는데 이곳에도 꽤 많은 직업군이 존재했을 것 같았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에 20개소의 행궁이 존재하는데 유일하게 이곳 '광주행궁'에만 종묘와 사직을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행궁 내부 관람 중에 유독 내 눈에 들어온 건물이 있었다.

 마치 기와지붕 아래에 커다란 대문만 세워져 있는 것처럼 보여서 궁금해서 안내판을 읽어보았다.

'좌전(royal ancestral shrine)'이라고 쓰여 있었다.

조상들의 신위를 모시는 곳으로 1711년에 건립되어 역대 왕과 왕비의 제사를 지내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남한산성행궁 안내도


 철종 13년에는 남한산성에서 유생들의 문과시험을 치르는 장소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철종은 장수하는 어르신들 중 70세 이상 노인에게는 쌀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생존수명이 짧아서 70세까지 살면 장수하는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또한 병자호란 때 전사한 사졸들의 제사를 지내주는 곳으로도 활용되었다.

고종 4년에는 유생들의 문과시험도 치렀지만 야간군사훈련을 실시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고 전해졌다.


 남한산성은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문화유적으로서의 가치가 가장 큰 곳이었다.

의미를 추구해 본다면 경기도의 관광지로서 지역경제 활성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워낙 남한산성 내부가 넓어서 경찰지구대와 소방서까지 잘 갖추어져 있었다.

남한산성 내부의 행궁을 돌아보면서 스치는 생각은 경기도민의 건강을 위한 힐링공간으로서의 기능까지 완벽하다는 것이다.

속절없이 시작한 드라이브에 역사탐방 제대로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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