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내 손을 잡았다.
숟가락을 쥐고 있던 여섯 살 나의 손.
밥을 먹던 평범한 어느 날, 엄마는 내 손을 꼭 잡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저 작고 따뜻했던 엄마의 손이 갑자기 차갑고 무서워졌다는 느낌만 기억난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이 일화는 뇌과학자 정동선 박사의 이야기다.
그는 이 일화를 세바시 무대에서 고백했다.
뇌과학자로서가 아니라, 아이였던 자신의 기억을 끌어올려 ‘우울’이라는 감정의 본질을 이야기했다.
그가 말하는 우울은 '슬픔'이 아니었다.
'눈물 흘릴 힘조차 없는 상태,
감정의 감각 자체가 꺼진 상태.
뇌의 특정 회로가 마치 차단된 듯,
모든 것이 멀어지고, 세상과의 연결이 끊어진 느낌'을 이야기했다.
엄마는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너무 외로웠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으며,
이 어린아이라도 ‘같이 있어 줬으면......’
그 절박함의 끝에서 나온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이였던 그는 '살자'라는 한 마디로 그 상황을 붙들었다.
그 말은 생존의 외침이자, 엄마를 향한 마지막 연결이었다.
그 후 엄마는 그가 열아홉이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에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들아… 미안하다. 사랑한다.”라고 말하면서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것은 엄마의 유언이자, 사랑의 마지막 언어였다.
이 장면은 더 이상 과학의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건 기억이고, 감정이고, 사랑이었다.
정동선 박사는 말한다.
감정은 뇌에서 느끼는 감각이며,
그 감각은 사람과의 연결 속에서 유지된다고 한다.
어떤 이가 '죽고 싶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그 말이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나를 좀 도와줘'라는 신호라고 한다.
아이가 말한 '살자'라는 말은 그 신호에 응답한 유일한 언어였다.
그는 그 말로 엄마를 잠시라도 살게 했고,
그 말은 이후 그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우울을 앓는 사람들은 말하지 않는다.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더 깊이 침묵한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아주 작은 말 한마디라도.
“괜찮아.”
“네가 거기 있는 걸 알아.”
“같이 있어줄게.”
때로는 그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조용히 되살려주는 유일한 길이다.
오늘 누군가의 손을 잡는다면 이렇게 말하자.
“우리, 살자.”
그 말이 누군가의 생을 붙잡을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