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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포자가 무슨 은행이냐?

그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by 인문학 큐레이터
당시 동기 曰, 너 진짜 바쁘게 산다. 내가 다 안쓰러워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20대를 보냈다.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고 소위 스펙을 쌓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매번 수업시간에 졸아 교수님께 따로 불려 갈 정도로 바쁜 대학생활을 보냈다. 교내 근로장학생이 되어 공강 시간마다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했고, 수업이 끝나면 곧장 카페에 달려가 커피를 내렸다. 주말에는 2시간 내리 지하철을 타고 문래동으로 향했다. 국회의사당을 바라보며 전국에서 모인 대학생들과 기자단 활동을 위한 회의를 했다. 방학 때는 매일 아침 8시, 강남구청에 있는 어학원에서 영어공부를 했다.


몸이 열개라도 모자란 대학 생활을 보냈던 탓일까?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할 만한 직장에 들어갔다.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은 수도권 대학교 출신인데, 우리나라 국민 누구나 알만한 은행에 떡하니 정직원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수학이라면 질색하는 내가 은행이라고? 나도 그랬고 내 친구들도 의아해했다.


내가 이 직업을 택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어서.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원하는 직장은 내 보잘것없는 스펙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내 전공을 살려 해외영업을 하고 싶었으나 굴지의 무역회사나 상사 혹은 외국계 기업은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토종 한국인인 나를 뽑아줄 이유가 없었다.


외국인들과 대화하는 것도 좋아하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어 하는, 역마살이 잔뜩 낀 나를 만족시키려면 승무원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강남에 위치한 유명 승무원 학원에서 면접 스터디를 하며 대형 항공사에 지원도 했었다. 10cm 힐을 신고 서서 30분 동안 입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웃으니 머리가 핑 돌았다.


고객 서비스가 목적이어야 하는데 여행이 목적이었던 나는 그야말로 광탈했다. 여러 항공사에 줄줄이 낙방하며 더 이상 하고 싶은 게 없었다. 당장 4학년 2학기였는데 말이다. 그 당시 만나던 남자 친구가 제2금융권 준비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내 친구 작년에 입사했는데 거기 연봉도 많이 주고 무엇보다 정년도 보장 되잖아. 육아휴직도 보장되어 있어서 여자도 지점장 할 수 있대 꽤 괜찮은 직장 아니야?'


9시부터 6시까지 일하고, 야근도 안 하고, 연봉도 좋고 정년도 보장되고 직장으로 이만한 데가 없다 싶었다. 평생 숫자와 데면데면했던 나는 졸업을 목전에 두고 다시 숫자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당장 먹고살아야 하니 말이다.


시험까지 3개월이 남았었고 3개월 내내 도서관에서 필기시험 준비를 했다. 수포자였던 내게 다시 돌아온 수리 영역은 정말 곤혹스러웠다. 열 번 풀어도 이해가 안 됐다. 내가 문제를 푸는 것을 보고 당시 같이 스터디하던 수리 고수는 '어 좀 힘들겠는데요...?'라고 했다. 나는 콧방귀를 뀌며 하던 대로 열심히 했다. 결국 그는 또 떨어지고 나는 한 번에 붙었다.


사실 운이 좋았다. 초심자의 행운이란 이런 것일까? 누구는 1년 넘게도 준비하고 재지원도 많다던데 나는 3개월 만에 덜컥 붙어버렸다. 아침 합격 문자를 받고 침대에서 방방 뛴 기억이 있다. 졸업하기 전에 취업을 하게 된 것이 너무 기뻤다. 더 이상 아르바이트를 하며 매달 50만 원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 이 회사에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지점장까지 하겠노라 다짐했다.


정확히 입사 5개월 차 나는 과장님을 따로 불렀다. '저 퇴사하겠습니다'


1월에 입사하고 5월에 퇴사하려 했으나 3년 더 버텼습니다.


적성과 전혀 맞지 않는 직업을 택한 대가는 참혹했다. 아마 전 세계 사람들을 자유로운 순서대로 줄을 세운다면 나는 10등 안에 들 자신이 있다. 그럴 정도로 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런 나는 보수적인 집단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다. 입사 1년 차에는 눈치 보느라 휴가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보고해야 했고 조그만 잘 못이라도 할까 봐 밤에 잠도 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를 싫어하는 선배가 있었다. 일을 못해서 지적하는 거라면 OK. 하지만 업무 외적으로 사사껀껀 눈치 주고 불러내서 한마디를 했다. 왜 손님에게 웃지 않느냐는 둥, 머리를 제대로 묶으라는 둥, 목소리 좀 더 크게 하라는 둥 신입이 일 배우느라 정신없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적을 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나보다 더 불친절한 선배였는데 말이다.


나중에는 정말 사소한 거 하나까지 지적을 했고, 손님들 다 있는데서 호통을 쳤다. 참다못한 나는 눈물을 흘렸다. 너무 창피했다. 이러려고 내가 대학을 나오고 취준을 한 게 아닌데 말이다. 그 일련의 사건들이 있고 나는 상급자들과 이야기하며 그만두겠다고 했다. 들어온 지 4개월밖에 안된 신입이 그만둔다고 선언하자 그들에게 꽤나 충격이었나 보다. 내가 잠깐 퇴사를 유보하고 출근하지 않을 때 단체로 '90년 대생들이 온다'라는 책을 돌려 읽었다는 건 아직도 코미디다.


'야 1년만 더 버텨봐. 퇴직금이라도 받고 나가야지' 동기 언니의 말에 1년까지만 더 참아보기로 했다. 사실 나아질 줄 알았다. 후배가 들어오면 사사껀껀 트집 잡는 것도 멈출 것 같았고, 자유로운 나도 조금 보수적인 사람이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내 몸과 마음은 더 심각해졌다.


워낙 책임감 있는 성격 탓에 일 잘하는 직원이 되었지만 성과가 쌓일수록 병원비도 쌓여갔다. 과도한 스트레스는 원인 불명의 질병을 앓게 했다. 가장 먼저 앓았던 과민성 대장 증후군은 밥을 먹는 순간에도 화장실을 가게 해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했다. 손님이 앞에 앉아 있는데 화장실로 달려간 적도 있다. 6개월 고통받다가 잠잠해질 즈음 어느 날 피부에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차라리 먹고 싸는 게 나았다. 온몸이 간지러웠고 가만히 앉아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유명한 한의원에서 한약을 지어먹었다. 그렇게 내 월급의 절반은 병원비로 지출하게 되었다. 또 6개월 남짓 고통받다가 증세가 호전될 즈음이었다.


저 귀가 안 들리는데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한쪽 귀가 먹먹했다. 마치 동굴 속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이러다 말겠거니 했지만 다음날이 돼서도 똑같았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거 심상치가 않는구나'. 그날 반차를 내고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병명은 돌발성 난청. 일주일의 골든타임을 놓치게 되면 영원히 귀가 들리지 않는 질병이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이비인후과에 붙여있던 문구 하나 '청각장애인 판정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결국 2주 동안 휴가를 쓰며 치료에 전념하게 되었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나는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이미 입사한 지 3년 차에 접어들었는데 안 아픈 순간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 거지?', '이다음은 뭐일까? 우울증? 공황장애?'


당장 먹고살겠다며 적성에 맞지도 않는 직업을 선택한 대가가 이거라니. 절망적이었다. 거울을 보면 표정은 항상 어두웠다. 매일 피곤했고 살고 싶지 않았다. 코로나가 창궐하고 매스컴에는 대기업들이 더 이상 신입을 뽑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뉴스로 가득했다.


모두가 말렸다. 이제 나이도 30대에 접어드는데 무슨 퇴사냐, 이제 와서 적성을 따질 거냐,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 나도 알고 있다. 내가 제일 잘 안다. 이 대기업이라는 껍데기를 벗은 나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하지만, 그게 두렵다고 더 이상 숨만 쉬는 죽은 나를 방치할 수 없었다. 이러다 진짜 소리 없이 사라질 수도 있으니


난 나를 살려야 했다. 입사한 지 3년 5개월, 그렇게 난 회사와 손절하고 손절연구소의 대표가 되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먹고사는데 집중해 내가 무얼 잘하고 무얼 좋아하는지 잊고 살았는데. 퇴사하니 보였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말이다.


인생은 길다. 아마 내가 살아가면서 기대수명은 더 길어질 것이다. 당장 먹고살기 힘들다고 문제 투성이인 삶을 위태롭게 유지하지 않은 내가 자랑스럽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25살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힘들게 들어간 직장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대책 없이 퇴사해버린 나를. 아마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그런 결정을 했다고? 정말 대단한데! 앞으로 얼마나 더 멋진 일을 해낼지 기대된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나는 생각보다 더 잘살고 있다. 진짜 하고 싶던 공부를 하고, 나와 같은 고민을 안고 있던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누군가 나처럼 회사와 손절하지 못해 고통받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면 이렇게 얘기해 주고 싶다.


퇴사하면 내가 아무것도 아닐 줄 알았는데 사실 회사라는 껍데기를 벗어버리는 순간, 당신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깨달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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