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생각나는 날
할아버지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장성한 아들이 할아버지 멱살을 잡는 모습이다. 술을 마신 아들은 할아버지를 벽에 밀어붙여 머리를 찧게 만들었다. 말리는 사람이 있었던가?
그날 이후 할아버지는 고집을 부려 자식과 함께 살던 집에서 나갔다. 오래전 당신의 아들과 함께 지었을 기와집을 떠나 보잘것없는 시멘트집을 짓고 할머니랑 둘이 살았다. 죄 없는 할머니, 고생만 오지게 한 나의 할머니는 며느리가 차려주는 뜨신 밥도 못 먹고 찹디찬 그 집에서 굽은 허리로 부엌일을 직접 하셔야 했다.
섬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마친 나는 뭍으로 나가 고등학교를 다녔다. 주말에 집에 올 때면 한 번씩 할아버지를 보러 갔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나중에 변호사가 되라고 하셨다. 그리곤 한 번씩 우편물을 꺼내서 읽어달라고 부탁하셨다. 할아버지는 까막눈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태어났고 6.25도 겪은 내 할아버지.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었고 학교를 다닐 기회가 없으셨던 모양이다. 밤낮으로 일해 가난은 면했지만 글을 배우진 못하셨고 한으로 남았다. 기다리는 우편물이 도착해도 읽지 못했고 자존심 때문에 자식들에게 가져가지도 못했고 어쩌다 찾아오는 나어린 손녀에게 내밀었다.
가끔 그 등기 서신을 읽어주다가 알게 됐다. 할아버지는 마을 이장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계셨다. 자식들이 다 말리는 싸움이었다. 할아버지가 쇳덩이처럼 젊은 시절, 할아버지는 나무를 베서 그걸 땔감으로 팔아 돈을 벌었다고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농사 지을 땅도 사고 마을에 있는 작은 산 하나를 샀다. 산이라 해봤자 건물을 지을 수도 없고 주변에 개발 호재가 있을 리도 없는 땅이라 큰돈은 안 됐다. 당장 재산을 내놓으라고 아비 멱살을 잡던 아들도 탐을 내지 않았던 땅이니까. 어쨌든 그 산은 할아버지 소유가 맞았다. 나무땔감을 팔던 할아버지에게 그 산은 중요한 자산이었을 것이고 자신을 갈아 넣은 젊음의 일부였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원한 건 그 산 등기부 소유자 칸에 당신의 이름 석자를 올리는 것이었다. 지금 같은 전산시스템이 없을 때 샀던 땅이라 어쩌다 그 산이 마을공동의 재산인 것처럼 처리된 모양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받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의 것이 맞으니 그걸 법적으로 확실히 하고 싶다는 거였는데 마을 이장은 이를 못마땅해했고 소유주를 다투는 소송을 벌이게 된 것. 결과는 할아버지의 승리였다. 아니 그렇지도 않았다. 법은 할아버지 소유가 맞다고 판결했다. 자식들은 왜 쓸데없이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는 일을 벌이냐고 할아버지를 원망했다. 소송을 벌인다고 마을 쪽에서 쓴 돈이 몇백되는 모양인데 지척에 살던 막내아들이 그 돈을 이장에게 돌려줬다. 할아버지 편은 없었다.
할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좋은 아빠가 아니었을 것이다. 일곱 자식 모두 남부럽지 않게 교육시키고 싶었는데 -먼 훗날 나의 아빠가 된- 셋째 아들이 국민학교를 졸업하더니 중학교는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사실 당시에 시골에는 국민학교만 나온 사람들이 흔했다. 할아버지는 내 아빠의 고집을 꺾으려고 아빠를 나무에 묶어놓고 팼다고(!) 했다. 까까머리를 한 어린 내 아빠가 맞는 모습을 상상하면 웃음이 났지만 나무에 묶어놓고 패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그렇게 맞고도 학교에 안 간다고 했단다.) 마을을 상대로 소송을 벌인 것도 괜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자식들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허리도 못 펴는 할머니랑 그 창고 같은 집에 살기로 고집부린 건 뭘 모르는 내가 봐도 너무 잘못된 결정이었다. 그냥 우리 집에서 아들이랑 며느리랑 손주랑 살아도 됐는데. 당신의 멱살을 잡은 아들이 셋째 아들은 아니었잖아요.
할아버지랑 한 지붕 아래 살면서 같은 방을 쓰던 시절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엄마랑 아빠랑 동생이랑 한방에서 잤는데 내게 책상이 생기면서부터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은 방에서 잠을 잤다. 그때 할아버지가 글을 모르시는 걸 알았다면. 내가 가르쳐드렸다면 어땠을까. 당신이 내게 시계 보는 법을 알려줬던 것처럼. 그땐 우리에게 시간이 있었는데.
조부, 있잖아.
오늘 여기 비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