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는 누구나 다 어른이었다. 조금 나이 많은 동네 고등학생 형도 어른이었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윗집 아저씨도 어른이었다. 선생님은 어른 중에서도 더 무서운 어른이었고, 부모님은 어른 중의 어른이었다. 어른의 말은 항상 옳았다. 어른이 하는 행동에는 무조건 이유가 있었고, 어른들만 할 수 있는 행위들도 많았다. 어른만 볼 수 있는 것, 어른만 마실 수 있는 것이라며 내가 손도 대지 못하는 것들도 있었다. 어른들에게는 대들어서도 안 됐고, 말대꾸도 쉽게 하지 못했다. 어떤 어른은 어린아이와 겸상하는 것조차 싫어하기도 했다.
어린 나는 어른을 동경했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하는 이들이 대단하게만 보였다. 어른들은 매운 음식을 아무렇지 않게 먹고, 휘파람도 잘 불었다. 무거운 물건도 번쩍 들고 손이 벨까 무서운 통조림도 쉽게 열었다. 어른 중에서도 더 나이 든 어른이 더 멋있어 보였다. 내가 갖고 있는 무수한 궁금증과 호기심과 질문들이 그들에게 가면 금세 명쾌한 답으로 돌아왔다. 지금이야 단순히 시간이 흐른다고 모두 똑같은 어른으로 자라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때는 어서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고 싶었다. 못 하는 게 없고 모르는 게 없는 어른이 되면 겁 많던 어린이에서 무서울 게 없는 당당한 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새해 첫날 떡국을 먹은 횟수만큼 어린이는 소년이 되고 또 청소년이 되었다. 시간은 쉬지 않고 흘렀고 시간이 흐른 만큼 아는 것도 많아지고 몸도 커졌으며 힘도 세졌다.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며 조금씩 머리가 굵어질 무렵에는 어른이 다 같은 어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애만도 못한 어른들이 아주 많았다. 수염이 나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가끔 한심스럽게 바라보게 되는 어른들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어른들을 새롭게 만난 것이 아니라, 원래 별로였던 사람을 그제야 구분할 수 있게 된 거겠지. 우습게 보았지만 괜찮은 사람인 경우도 있었고, 좋게 보았지만 나쁜 사람인 경우도 있었지만, 사람이 다 같지 않다는 것을 구분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였다. 그 무렵의 나는 내가 동경해야 하는 어른이 그냥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책임감을 갖고 삶을 견뎌내는 사람이라고 재규정했다.
대학 시절에도 그 생각은 여전했다. 나는 또래들과의 술자리에서 남자란 40대 이상 중장년은 되어야 비로소 남성으로서 매력과 정체성을 갖게 된다고 외치곤 했다. 내 기준으로 선배들이라고 다 어른이 아니었다. 후배들에게 어른이고자 하는 ‘애’들도 많았다. 누군가는 ‘어른미’를 온몸으로 풍겼지만, 누군가는 철없이 자리에서 나오는 권위에 의존하려 했다. 나는 사회적 책임감을 잔뜩 짊어진 채 제대로 깎지 못해 거뭇한 수염과 머리 사이사이로 흰 가닥이 여럿 뻗쳐 있는 남자가 ‘진짜 남자’라고 생각했다. 사소한 일들에 흔들리지 않고 적당한 연륜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득함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막연한 환상을 가진 채로 시간은 계속 흘렀다. 나는 그사이에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나이도 서른이 넘었으니 굳이 따지면 어른이 된 셈이다. 어린 친구들이 ‘형’보다 ‘삼촌’이라고 부르기에 더 적합한 나이와 외모가 되었다. 혼자 살며 살림을 한 지도 10년, 사회생활을 하며 돈을 번지도 6년이나 됐다. 경험은 계속 쌓였고, 세상이 어떠한 곳이고 삶의 무거움이 어떤 것인지 대충은 알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스무 살의 나는 ‘10년 후의 나’의 모습을 자주 상상하곤 했는데, 그 상상과 지금의 모습에 비슷한 점이라고는 정장을 입고 구두를 신고 있다는 것 외에는 거의 없다.
어릴 적 상상했던 어른의 무게감은 출퇴근길의 고단함과 일에서 얻는 성취감과 인간관계의 스트레스와 그럼에도 깊어지는 내면과 쌓이는 실력에서 생기는 만족감이 어우러진 다채로운 것이었다. 가족이나 동료들을 책임지고 자질구레한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것이었다. 실제로 어른이 된 내게도 무게감은 생겼다. 상상했던 모습과는 매우 다를 뿐이다. 오늘날 나의 무게감은 부족한 수면시간과 성과에 대한 압박과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막막함이 합쳐진 딱딱하고 차가운 단색의 무언가에 불과하다. 아름답지도, 매력적이지도 않고 무겁기만 하다.
어른이 되어도 어린 날의 나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돈가스와 초콜릿을 좋아하고, 약속이 없는 날 퇴근 후에 비디오게임을 즐긴다. 아방가르드 한 프랑스영화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더 좋아하고, 쇼펜하우어나 괴테의 책 보다 휴대폰으로 보는 무협지가 더 재밌다. 아침마다 홍삼과 비타민은 꾸역꾸역 억지로 챙겨 먹지만 단맛보다 쓴맛이 더 강하게 느껴져 인상을 찌푸린다. 사무 일을 하느라 어깨가 굽어서 그런지 고등학생 때보다 키는 오히려 줄었다. 책임은 무겁고, 대출은 무섭고, 먹고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나는 어른이라기에는 너무나 애 같다. 어른스러운 아이라서 애어른이 아니라, 애 같은 어른이라 애어른이다.
나는 이렇게나 달라진 게 없는데, 사회는 내게 점점 더 냉정해진다. 어린 시절에는 언제든 기댈 수 있던 부모님의 품이 있었지만, 오히려 지금은 생각보다 더 이른 부모님의 기댐이 부담스럽다. 급한 일이 생겨도 손을 내미는 이는 적다. 대부분의 일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 경조사는 끊임없이 있어 얼마를 내야 하나 고민하게 만들고, 아파도 쉬지 못하고 출근해서 낑낑대며 일을 한다. 보험은 뭐고 적금은 뭐고 자취방 천장의 형광등은 또 어떻게 갈아야 하는 건지, 알아서 해야 하는 것들 투성이다. 누구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지만 알아서 잘 해내야만 한다. 도대체 어른들은 어떻게 이런 걸 다 참고 살아왔던 걸까.
결국 나도 둘리보다 고길동 아저씨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짱구보다 짱구아빠 신영만 씨의 대단함을 느끼는 어른이 되었다. 어릴 때 생각한 어른의 모습은 다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며, 집을 사고 차도 몰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1인 가구 가장으로서의 삶도 쉽지 않기에 내가 감히 그 이상을 꿈꿔도 되는지 조차 모르겠다. 때론 보호받고 싶고, 때로는 책임도 피하고 싶다. 매주 로또를 사며 이것밖에 답이 없다고 투덜거리는 삶보다 매주 금요일 밤 KBS에서 방송하던 만화영화를 기다리던 삶을 살고 싶다. 나는 청소년들이나 아이들에게 부모님이나 선생님, 그리고 다른 어떤 어른들도 하지 않는 말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어른이 되기를 바랐지만 그러기엔 나 역시도 미숙하고 어리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어른이 되고 싶다던 막연한 동경은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이미 어른이 된 것 같지만, 또 다른 어른으로써의 삶을 동경하는 것은 내가 아직 어린애 같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10년이 더 지나 마흔 즈음이 되면 지금과 생각이 달라질까. 시간이 더 많이 흘러 머리가 다 하얗게 샌 어른이 되면 상황이 또 다를까. 어쨌든 오늘도 어른으로 살아간다는 무게감을 한껏 느끼며 하루하루 견디고 또 견딜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