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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 Feb 21. 2024

깍두기 - 조금 부족하거나 달라도 안아주었더랬습니다.

 우리 어릴 적에는 몸으로 하는 놀이가 참 많았다. 축구나 캐치볼 같은 스포츠는 기본이고, 한창 유행하던 사극을 보고 편을 나누어하던 전쟁놀이도 있었다. 학교를 마치면 놀이터에 모여 ‘얼음땡’을 했고, 놀이기구를 요리조리 넘나들던 ‘경찰과 도둑’을 하다가 팔다리를 긁혀 상처가 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아파트단지 입구에 놓인 바퀴 달린 바리케이드나 벤치에 조성된 등나무처럼 조금이라도 발 디딜 데가 있는 것이 보이면 기어오르기 바빴다. 이유도, 목적도 없었다. 산이 그곳에 있기에 올랐다던 어느 탐험가의 말처럼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나이에 마침 눈앞에 기어오를 것이 보였을 뿐이다.


  스마트폰도 유튜브도 없던 시절이다. TV를 많이 보면 바보가 된다며 혼이 나고, PC방과 만화방은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오락실 근처는 어설프게 돌아다니다가는 몇 개 있지도 않은 백 원짜리 동전까지 ‘삥’을 뜯길 우려가 있었다. 분식집이나 문구점 앞은 어른들이 하사하신 용돈이 있을 때나 어슬렁거리지, 무일푼으로 갔다가는 다른 아이들의 간식이나 장난감을 부러워만 하다가 금세 심심함과 박탈감에 시무룩해져서 집으로 돌아가기 십상이었다. 결국 몸과 마음이 그나마 안전한 공간은 누군가의 부모나 선생이 가까운 거리에 있던 운동장이나 놀이터밖에 없었다. 그곳에서는 가진 것 없이 몸만 있어도 몇 시간이고 실컷 놀 수 있었다.




 몸으로 하는 놀이는 쉽게 생각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보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사실 그렇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요즈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40명이 살짝 넘는 한 반에 한 명씩은 신체적이나 심적으로 조금씩 문제가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특히 신체적 장애보다 지적인 장애를 가진 친구들이 더 많았다. 최근 통계로 우리나라의 지적장애 인구 비율이 2%가량 된다고 하니, 50명이 모여 있으면 한 명 정도에게는 경중을 떠나 지적장애가 있을 법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평범함의 잣대를 설정하고, 그 기준을 넘어서는 이들을 평범하지 않다거나 비정상이라고 판단한다. 그렇게 판단하는 순간 그 대상을 개인의 일상 또는 집단의 생활에서 배제시키려 드는 경우는 그리 드물지 않다. 당장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말이 어눌한 누군가 갑자기 대화를 걸어온다면 대부분 경계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것이라 확신한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렵게 여겨질수록, 평범하지 않다고 여기는 대상에게는 지극히 배타적이고 적대적이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억을 더듬거리며 되살려보면,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최소한 또래집단에서 만큼은 그러한 배타성이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는 ‘우리는 모두 친구’라던 만화영화 포켓몬스터의 주제가처럼, 조금 다른 점이 있어도 어떻게든 같이 어울릴 수 있었다. 무리를 지어 놀다 보면 수가 딱 이등분되는 짝수로 떨어지지 않거나, 어울리는 이들의 신체적 발육정도에 따라 강약이 확연히 정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면 우리는 조금 약하더라도 장애가 있는 친구를 자연스럽게 끼워 넣었다. 그들에게는 룰을 어겨도 질타하지 않는 특권이 있었고, 그들을 배려해서 조금이라도 덜 위험하게 사리는 무의식적 노력이 발현됐다. 우리는 그들을 ‘깍두기’라고 불렀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깍두기라는 은어는 놀이에 제대로 속하지 않은 채 덤으로 같이 노는 상태를 뜻한다고 한다. 깍두기가 밥상의 주가 되는 배추김치가 아니라 그런지, 네모반듯한 깍두기에는 이따금씩 무의 둥근 부분이 섞여 모양이 다른 것들이 있어서 그런지, 왜 그런 표현이 불었을 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원이나 사전적 정의를 떠나 우리는 그냥 자연스럽게 깍두기와 함께했다. 치열하게 악다구니를 쓰며 시시비비와 승패를 가리지 않아도 마냥 즐거웠고, 내가 즐거우려면 친구들도 모두 즐거워야 한다는 기본적인 진리를 어렴풋이 느꼈다. 해가 뉘엿뉘엿 지거나 엄마가 놀이터를 향해 밥 먹으러 적당히 놀고 들어오라고 호통을 치기 전까지 우리는 마냥 신나고 즐겁고 재밌게 놀았다.


 그런 깍두기들이 사라진 것은 교복을 입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또래집단이라면 누구나 친하게 지내던 시기를 지나(본인들끼리 짱이네 일진입네 하는 이들은 있었지만 사실 그냥 다 친구였다), 조금씩 사회적 자아가 발현되며 나름의 서열을 정하게 되던 순간부터 조금의 다름은 약점이 되고 배척의 대상이 됐다. 막연하게 누구나 다 친구가 될 수는 없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집단성은 강화되고 배려는 약해졌다. 깍두기가 사라진 자리는 왕따가 차지했다. 약자는 공공의 적이 되었고, 적의가 없는 이들을 타자화하며 공격하고 매도하는 것은 집단의 유대감을 고취하는 수단이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면서도 그러한 악의적 배타성은 여전했다. 왕따라는 단어는 은따(은근히 따돌림)나 전따(전교생이 따돌림) 등의 단어로 파생되었고, 대학에 가서는 아싸(아웃사이더)라는 용어로 덜 유치하게 포장됐다. 학교폭력이나 따돌림으로 인해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나 비인륜적인 폭력으로 상해를 입고 심할 경우 살해당하는 경우도 뉴스에서는 적지 않게 다뤄졌다. 반인륜적이 아니라, 정말 인간이라 해서는 안 될 정도의 저열하고 저급하고 악랄한 행위들이었다.     




 한참 어린 친척 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거나 이따금씩 TV나 유튜브에서 다뤄지는 아이들의 문화를 보면 요즘에는 깍두기, 또는 그 비슷한 문화도 사라진 것 같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과다한 정보가 아이들에게 전해지며,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지나치게 광범위한 사회적 자아를 형성하기 때문일까. 갈수록 배려는 적어지고 배제는 늘어나는 듯하다. 생긴 게 다르거나 사는 곳이 다르거나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이유로 너무나도 쉽게 그와의 관계에 선을 긋고 ‘우리’라는 개념을 배제시킨다.


 나는 이러한 현상에는 부모의 책임이 무척 크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현대사회가 갈수록 자본논리가 심화되고 거기에서 기인하는 계층화가 노골적이게 된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삶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다름을 받아들이고 차이를 이해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상투적인 말처럼, 아이들이 보고 배우는 것은 부모의 말과 행동이다. 부모가 차별과 혐오의 언어를 일삼으면 원치 않게 이에 노출되는 아이들은 그것이 세상의 당연한 섭리인 것처럼 이해하고 인식할 수밖에 없다.


 대학시절 충격으로 남은 기억이 있다. 학교에서 알바를 하기 위해 가는 버스에서 겪은 일이다.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한 여성분이 여덟 살 즈음되었을 아이를 데리고 탔다. 아이는 학교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누구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신나서 재잘거렸다. 그 아이가 새로 만난 친구가 너무 잘 맞는다며 절친이 될 것 같다고 말하는데, 아이엄마가 아이의 말을 탁 끊으며 물었다. “그래서 걔는 어디 산대?”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답했다. “걔는 학교 앞에 휴먼시아 산대. 놀이터도 대따 가까워!” 그러자 대답을 들은 아이엄마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리고는 훈계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걔랑 놀지 마!”




 도대체 그 어린아이가 학교에서 만난 친구랑 놀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본인이 얼마나 비싸고 좋은 집에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임대아파트로 알려진 집에 사는 아이와 자신의 아이가 어울리지 못하도록 막을 정도의 일이었을까. 무언가를 강하게 얘기하기 이해서는 설득력과 논리가 있어야 한다. “나는 A와 놀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A는 다른 사람을 때리는 사람이니까.”라는 말과 “나는 A랑 놀지 않을 거야. 왜냐면 우리 엄마가 A랑 놀지 말라고 했거든.”이라는 말 중 어떤 게 더 타당할까. 그 아이는 논리에 대해서 배워야 할 나이에 말도 안 되는 엄마의 명령이 지상명제인 것처럼 행동하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엄마가 그렇게 말했어도 그 아이가 그 친구와 재밌게 놀며 잘 지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누군가가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는 우리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 그건 그의 자유이다. 그러나 그 견해를 주장하기 위해서 무논리와 막무가내로 무장한 채 타인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은 결코 자유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누군가를 상처 입힐 권리 따위는 없다. 그 행위에 대한 사회적 질타와 지적을 감수할 각오를 하고, 자신의 권리가 침해될 각오를 하더라도 결코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행위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떨까. 익명 또는 실명을 걸어두고 태연자약하게 적어대는 악플과 비방들, 학교와 회사를 막론하고 벌어지는 저급하고 저열한 따돌림들이 만연하다. 슬프고 또 슬픈 일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라고, 또는 그 이전의 90년대고 80년대라고 혐오와 차별이 없었을 리 없다. 사회의 도덕관념이 조금 더 낮았을 수 있고, 어쩌면 그 배타성이 더 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어린 시절만큼은, 냉정한 사회보다 따뜻한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어린 시절 깍두기로 함께 놀던 지적장애가 있던 친구가 기억난다. 다른 학부모들이 그 아이를 특수학교로 보내야 한다는 논의를 했다는 기억도 있다. 그러든 말든 우리는 잘 놀았다. 때로 약하다는 이유로 그 아이를 괴롭히는 애들도 있었지만, 그런 아이들을 저지하는 애들도 분명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그 친구의 엄마는 아이를 안고 펑펑 울며 말했다. “졸업해 줘서 고마워.”라고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할 일이 된다. 우리 사회가 조금 다르거나 부족하더라도 함께 안을 수 있는 곳이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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