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서는 학기에 한 번쯤 불우이웃을 돕는 성금을 걷었다. 수해가 잦던 장마철을 앞두고 한 번, 추위가 몰려오는 겨울을 앞두고 한 번. 모금 며칠 전부터 집으로 보내는 가정통신문에는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는 취지와 함께 성금을 모으는 날짜가 적혀있었다. 잊지 말고 꼭 부모님께 전달하라는 담임교사의 당부도 빠지지 않았다. 모금날 아침 부모님께 불우이웃 성금을 내야 하니 돈을 달라고 하면, 출근을 준비하던 아버지는 지갑에서 얼마를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되려 내게 얼마나 주면 되겠냐고 물어, 돈의 개념도 잘 모르던 어린 시절 천 원짜리 한 장이면 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성탄을 앞두고 팔던 ‘크리스마스씰’도 있다. 판매 수익은 결핵환자를 돕거나 예방하는 데 쓰였는데, 해마다 다른 디자인으로 발행됐다. 요즘에는 펭수나 뽀로로 같은 캐릭터 또는 유명 연예인의 얼굴이 그려져 나름의 소장욕을 불러일으키지만, 20년 전에는 민물고기나 세계의 전통의상 등이 그려져 나를 비롯한 어린아이들에게 별로 관심을 끌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우표와 비슷한 크기의 씰 10개가 붙어있는 한 장에 3천 원이었는데, 학교마다 할당된 건지, 학급마다 할당된 건지는 몰라도 꼭 한 장씩 사도록 독려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는 했다.
누군가를 돕기 위한 성금은 자발적으로 내는 것이 마땅하지만, 학교에서 걷는 성금은 마냥 선의와 자의에 의해 모이지 않았다. 돈을 모으는 날이면 담임은 반장에게 아이들의 이름이 번호대로 적힌 종이를 건네며, 순서대로 찾아다니며 돈을 걷고 얼마씩 냈는지 적도록 했다. 반 마다 달랐지만, 한 명씩 찾아 돈을 받는 반장도 있었고, “다 여기 봐!”하며 소리를 치고 1번부터 42번까지 자신의 책상 앞에 줄을 세워 돈을 받는 반장도 있었다.
반장은 누가 성금이나 씰 값을 얼마나 냈는지 알 수 있었고, 반장이 적는 종이를 본 아이들도 대충 서로가 얼만큼의 액수를 냈는지 알 수 있었다. 부모님이 주신 2천 원 중 천 원은 내고 천 원은 오락실 갈 돈으로 빼돌리는 친구도 있었고, 정말로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천 원짜리 한 장 쉽게 내밀지 못하던 친구도 있었다. 유난히 비싼 옷과 가방을 걸치고 다니던 친구는 턱 하니 초록색 만 원짜리 지폐를 내며 과시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불우이웃 돕기 성금이 뭐라고 돈을 적게 낸 친구들은 괜히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으며 위축되기도 했다.
성금이나 씰 구매 외에도 이웃을 돕겠다는 명목으로 이뤄진 것들은 제법 많았다. 북한동포에게 보낸다며 안 쓰는 학용품을 모으기도 하고(안 쓰는 게 없어서 새 공책이나 연필 한 다스를 내기도 했다), 집에서 폐품을 얼마 이상씩 꼭 가져오도록 하는 경우도 있어서, 읽지도 않은 신문 뭉치를 노끈으로 묶어서 내기도 했다. 아마 폐품을 고물상에 팔아 성금을 만들겠다는 취지였던 것 같은데, 정확히 어디에 쓰였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무언가를 모을 때마다 돈이나 물건을 적게 낸 아이들에게는 어떠한 형태로든 문책이 이어졌다. 은근한 눈치는 비교적 양반이었다. 노골적으로 다른 아이들 앞에서 “너네 집이 그렇게 가난하냐”며 구박하기도 하고, 회초리로 손바닥이나 허벅지를 몇 대 때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불우이웃을 돕자면서 왜 나는 안 도와주냐며 볼멘소리를 하던 어느 어려운 가정의 친구도 있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타인을 도와야 한다고 배웠다. 그 배움의 과정에서 다소의 잡음과 불만이 있었을지 언정 일단 학교에서는 그렇게 배웠다. 교과서에도 분명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한다고 적혀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상이 그렇듯 학교 밖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배운 것과는 많이 달랐다. 내가 자란 광주에는 지하철이 없었고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앉아 구걸하는 풍경은 TV 속 서울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구걸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따금씩 마주할 수 있었다. 시내라고 불리던 충장로에 가면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 가장자리에 종이박스를 두르고 앉은 채 앞에 놓인 깡통에 적선해 달라는 이들도 있었고, 월남전에서 다리를 잃었다며 수레에 몸을 싣고 두 손으로 땅을 디뎌 움직이며 구걸을 하는 이도 있었다.
우리 엄마는 어려운 사람은 꼭 도와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분이었다. 엄마는 어린 나를 데리고 함께 거리를 걷다 구걸하는 사람을 보게 되면 주머니를 뒤져 동전이나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어 내 손에 들려주곤 했다. 그러면서 구걸하는 분의 돈통에 던져 넣지 말고 정중하게 전하라 신신당부했다. 엄마가 깊이 새겨준, 약자를 보면 꼭 도와야 한다는 가르침은 지금까지도 남았고, 어린 나는 구걸하는 이에 대한 적선과 어려운 이에 대한 도움을 당연하게 여기며 자랐다.
세상 모두가 우리 엄마와 같지 않다는 것은 성인이 되고서야 알게 됐다. 홀로 상경한 나는 대학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고 아파트 단지 옆을 걸어서 학교에 통학했다. 자연스럽게 한동안 구걸하는 이들을 보지 못했다. 내심 ‘역시 수도권은 잘 사는 동네라 구걸하는 사람이 없는 건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오랜만에 누군가의 구걸을 본 것은 슬슬 대학에 적응을 하고 모처럼 본가에 내려가기 위해 버스터미널로 가던 지하철이었다.
분당선 지하철 열차 안에서 어느 분이 다리를 절룩거리며 지나갔다. 그는 느릿느릿 걸으며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무릎 위에 종이를 한 장씩 올려놓았다. 구구절절한 사연이 빼곡하게 적힌 종이의 맨 아래에는 ‘단돈 100원이라도 좋으니 제발 도와주세요’라고 적혀있었다. 열차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며 종이를 나누어준 그는 다시 뒤로 돌아 낡은 플라스틱 바구니를 앞에 들고 종이를 수거하며 걷기 시작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천 원짜리 한 장과 오천 원짜리 한 장이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 천 원짜리 지폐를 그에게 건네려 챙기고 오천 원짜리를 다시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옆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저거 누가 시켜서 하는 거 아냐? 돈 주면 뭐 해.”하는 내 또래 남자의 말에 그 옆의 여자가 답했다. “야. 저 사람이 우리보다 잘 벌걸?” 대화를 마친 그들은 애써 시선을 돌려 구걸하던 이와 눈이 마주치는 걸 피했다. 얼른 가져가라는 듯이 처음 그가 건네었던 종이를 들어 내밀고만 있었다.
살면서 쉽게 쓰지 못하는 단어들이 있다. 대개 그 단어의 무게가 가볍지 않아 아무 데나 붙일 수 없는 경우에 그렇다. 내게 ‘제발’은 그중 하나다. 누군가 제발 도와달라며 달리는 지하철을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데, 그런 이의 속사정이나 뒷이야기를 상상하면서까지 도움을 고민하고 싶지는 않았다. 누가 시킨 것이든, 하루에 버는 돈이 나보다 많든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주머니에 다시 넣으려던 오천 원짜리 지폐를 다시 꺼내어 들고 내 앞을 지나는 그에게 6천 원을 건넸다. 그는 깊이 허리를 숙였고, 나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에서 한참을 깊이 생각했다. 이웃에 대한 도움에 시니컬한 사람들의 모습은 어디에서 왔을까. 어린 시절 반강제적이었던 나눔의 경험 탓이었을까.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일단 자신이 챙겨야 한다는 각박한 현대사회의 생존경쟁의 결과일까. 분명 어릴 때는 어려운 친구를 위해 소풍날 김밥을 한 줄 더 챙기기도 하고, TV에서 안타까운 사연이 나오면 모금 전화가 빗발쳐서 화면 상단에 실시간으로 오르던 모금 현황이 금세 가득 차곤 했는데, 무엇이 달라졌을까. 고민이 깊어도 결론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 뒤로도 시간은 많이 흘렀다. 그 사이 여러 차례 다양한 사회적 도움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쟁이나 질병 등의 사회적 참사에 대해 평범한 시민들이 뻗은 도움의 손길은 결코 적지도 작지도 않았다. 거금을 쾌척하는 스타들의 모습은 익숙한 것이 되었고,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기부를 기꺼이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여전히 소외된 이웃은 존재하고, 작은 원룸에서 고독사를 맞이한 뒤 몇 달 만에 발견되는 이와 분유값이 없어 마트에서 도둑질을 하다 잡힌 이의 소식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언제부턴가 이웃을 잊은 것 같다. 옆집에 살면 인사를 하며 지내고, 맛있는 반찬을 하면 접시에 담아 들고 앞집 초인종을 누르던 시절은 지나가버렸다. 같은 아파트에 살면 이웃, 같은 동네에 살면 이웃, 내 주변에 있으면 이웃이라는 생각은 별거 아닌 도움과 마음이라도 기꺼이 베풀 수 있게 했지만, 사회가 달라지고 각자의 삶이 단절되면서 주변 사람들이 나의 도움과 선의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 잊혔다. 아이들에게 앞집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라 가르치는 게 아니라, 모르는 사람에게는 말을 걸면 안 되고, 타인의 삶에 간섭하면 안 된다 가르치는 세상이 되었다.
변화가 마냥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이웃에 대한 정이 많았던 만큼 납치나 범죄 등 흉흉한 일도 적지 않았던 과거다. 예전보다 복지제도나 전반적인 여건이 잘 갖추어져 고통받는 이웃의 수가 줄었고, 그런 국가와 사회에 대한 신뢰 역시 변화에 일조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은 더 이웃에 대한 사랑이 발현되는 세상이면 좋겠다. 당장 내 주변의 어려움과 아픔을 외면하지는 않는 사회라면 좋겠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나이브한 생각이 아닌, 보기 좋은 삶을 살아보겠다는 자기만족이라 해도 나눔이 더 늘 수 있다면 좋겠다. 나눔이 적더라도 숨을 쉬듯 자연스럽고, 도움이 작더라도 끼니를 챙기듯 당연한 것이 되면 좋겠다. 어린 시절의 교사처럼 강요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