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집 한 채는 가지고 살 수 있다 생각했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 집뿐 아니라 누군가의 집에 놀러 갈 일은 많았다. 친척이나 친구 때로는 가정집을 활용한 공부방까지 여러 집을 보았다. 아파트나 빌라, 주택까지 모두가 각자의 집에서 각자의 삶을 꾸려나갔다. TV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90년대 드라마에는 허름한 주택이나 단칸방이 자주 등장했고, 2000년대 초에는 옥탑이나 오피스텔 등 조금 더 다양한 주거형태가 배경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경제적 여건이나 가족구조에 따라 크기와 여건이 다른 다양한 집의 모습을 보며 막연하게 다들 누구누구네 집이라 불릴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전세계약이 끝나 이사를 가던 친구를 보며 집이 소유의 개념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럼에도 그것이 돈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돈이 조금 부족하면 작거나 허름한 집에 살면 되지만, 더 나은 여건에서 살기 위해 전세나 월세를 이용하는 거라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는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학교에 다닐 때는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많다 믿었기에, 더 넓은 평수에 사는 친구를 부러워하는 엄마의 넋두리가 이해가 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한 생각의 가장 밑바닥에는 누구나 당연히 각자의 고유한 공간을 가질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이 깔려있었다.
10여 년 전, 대학생활을 시작하며 독립을 했다. 처음으로 구했던 집은 보증금이 없었고, 1년 치 연세를 받았다. 흔히 말하는 사글세였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임대료를 일시불로 지불했고, 그 작은 방은 내가 처음으로 가진 나만의 공간이 되었다. 집을 떠나는 내게 엄마가 가르쳐준 것은 다름 아닌 살림이었다. 셔츠를 다리는 법이나 밥의 물 양을 잡는 법, 옷을 깔끔하게 개고 계란말이나 김치찌개 같은 간단한 반찬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엄마는 내게 최소한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강조했다. 집을 찾아오는 손님이 없다 하더라도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항상 정돈하고, 배달음식이나 편의점 음식에 의존하지 말고 밥을 차려 먹을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살림은 재밌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손으로 하는 무언가를 좋아하는 성격인데, 부모의 품을 떠나 자취를 시작한 이들이 자유를 만끽하는 것만큼, 나는 내 살림을 직접 꾸려나간다는 것을 즐겼다. 요리 프로그램을 보며 레시피를 메모해 두었다가 새로운 음식 만들기를 시도해 보거나, 잔주름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성스럽게 와이셔츠를 다리는 일은 즐거웠다. 적당한 알바로 매달 생활비는 어렵지 않게 마련할 수 있었다. 학교 공부도 그리 오랜 시간을 매일 할애할 만큼 어렵거나 많지도 않았다. 여유로웠다. 그리고 그런 여유는 주거비에 대한 걱정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 반수를 했다. 새롭게 들어간 대학은 수도권에 있었고, 주변에 아파트단지가 여럿 조성되어 있어 빌라나 원룸 같이 자취를 할 만한 공간이 많지는 않았다. 입학식을 앞두고 학교 바로 앞에 있던 원룸을 월세로 얻었다. 모퉁이에 있던 집이라 방이 각진 7각형이었고, 그 덕에 주변의 다른 방보다 조금 싼,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45만 원으로 계약할 수 있었다. 학교 쪽문 앞이었기에 창문을 열면 항상 담배연기가 들어오고, 친구와 둘이 나란히 누우면 가득 차던 그 방의 월세를 내기 위해 나는 매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생활비를 아껴야 했다.
군대에 다녀와서도 다시 다른 방을 구해 잘 살았다. 학교에서 거리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나름 유명한 카페거리에 있던 1.5룸이었다. 주방과 생활공간이 문으로 구분된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질은 올라갔다. 옷에 음식냄새가 벨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처음 알았다. 건물 1층에 있던 카페 사장님과 친해지고는 가끔 여유롭게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인 곳이었다. 물론 지나간 시간과 아주 조금 넓어진 면적만큼 부담해야 하는 주거비는 올라 있었지만, 다행히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닌 덕에 생활비와 월세를 큰 무리 없이 감당할 수 있었다.
주거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된 것은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서울에 집을 구하면서부터였다. 수도권과 수도는 생각보다 더 큰 차이가 있었다. 집값은 더 비쌌고, 평수는 더 작았다. 여의도로 걸어서 출퇴근을 하기 위해 당산역 인근의 원룸을 구했다. 그곳에서 세탁기가 방 안에 있는 경우를 처음 봤다. 보증금은 전에 살던 집의 두 배로 올랐고, 월세는 관리비를 포함하면 더 올랐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한 달에 버는 월급의 거의 절반이 주거비와 주거에 따른 필수 지출로 나갔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이 아니라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 되었는데 경제적으로는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직장을 다니며 대학원에 진학했고, 일과 학업을 병행하기 위해 학교 앞으로 이사를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살던 아파트 이후로 20년 만에 처음 10층 이상의 높은 건물에 살게 됐다. 옥상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저 멀리 롯데타워가 보였고, 늦은 시간까지 큰길을 오가는 자동차들을 보며 언젠가 나도 이 서울에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는 포부를 품기도 했다.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만 있는, 그 건물에서 가장 작은 집이지만, 높은 층수만큼 월세와 관리비도 비쌌다. 그런데 그것도 서울에서는 평균이라고 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같은 값을 내며 좋은 경치를 즐길 수 있으니 복 받은 거라 위안을 삼았다. 주로 사무실 건물에 있는, 앞으로 밀면 한 뼘 정도밖에 열리지 않는 창문 앞에 기대어 거리를 내려다보며 맥주를 한 캔 하는 삶은 그래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한 달 벌어, 한 달을 살며 그래도 조금씩 적금까지 들던 루틴 한 삶이 깨진 것은 바로 그 건물에서였다. 분명 계약서를 쓸 때만 하더라도 전입신고를 해도 된다던 집주인이 연말이 되자 세금이 많이 나왔다며 전화해서 온갖 욕을 쏟아냈다. 일흔이 넘은 집주인의 욕설을 듣다못해 전화를 끊었더니, 그 남편이 전화를 해서 또 한바탕 언성을 높였다. 그들은 그렇게 내게 폭언을 쏟아놓고는 일주일도 되지 않아 집을 팔아버렸다. 부동산을 통해 집이 팔렸음을 전해 듣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절망에 빠졌다. 집을 산 사람은 자신이 들어와 살겠다며 집을 비워 달라 했다. 법적 다툼을 하려면야 할 수 있었지만, 그 다투는 기간 동안 버틸 공간도 돈도 내게는 없었다.
부랴부랴 2주 만에 이사를 했다. 당장 시간도 이사비용도 없어, 같은 건물의 한 평 더 넓은 집을 급하게 구했다. 늘어난 면적은 고작 책상 하나 들어갈 정도였지만, 내야 하는 월세는 5만 원이나 올랐다. 그 집에서 계약기간 동안 살며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다. 월세와 관리비, 전기세나 가스비 등의 공과금, 대학원 등록금과 휴대폰 요금을 내면 한 달에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고작 50만 원 안팎이었다. 교통비도 부담되어 7km가량의 퇴근길을 걸어 다녔고, 친구들과 만나는 것도 은연중에 피하게 됐다. 직장생활을 하며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모아놓았던 얼마 되지 않는 돈을 까먹는 시간이었다.
버티다 못해 이사를 고민하던 중, 다행히도 LH에서 진행하는 청년전세자금대출에 당첨이 됐다. 그렇게 싫던 가난이 처음으로 내게 도움이 됐다. 계약기간이 끝나지 않은 집을 부동산에 내놓고, 매일 퇴근하고 집을 보러 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집을 가진 사람들은 개인세입자와의 계약보다 LH와의 계약을 부담스러워했다. 그렇게 들린 부동산만 20군데, 보러 간 집이 50곳은 될 무렵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10평짜리 40년 넘은 낡은 다세대주택을 구할 수 있었다. 몇 년 내 재개발 착공이 예정되어 있으니, 싼 값에 대충 살라는 집주인의 호의 아닌 호의였다. 물론 도배나 장판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스무 살 이후 여러 월세 방을 전전하느라 ‘우리 집’, ‘우리 동네’라는 애착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사는 집은 조금 달랐다. 절망적인 상황을 탈피했다는 안도감 덕인지, 지하철역이나 버스정류장과 한참 떨어져 있는 낡은 골목의 서울 같지 않은 동네 분위기 덕인지는 모르겠다. 벽에 포스터를 붙이고 큼직한 테이블도 사서 들여놓았다. 그러니까, 내가 딱 살기 좋겠다 싶은 정도로 공을 들여 살림을 꾸렸다. ‘내 공간’이 생기는 것의 안정감과 만족감을 딱 10년 만에 다시 느꼈다.
처음 자취를 시작할 무렵에는 서울시내의 수억 짜리 집을 사겠다며 몸부림치는 것보다 아등바등 아낄 돈으로 여행을 다니고 책을 읽으며 삶을 즐기는 것이 더 낫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서울에 살며 내게는 습관이 하나 생겼다. 길을 걷다 부동산이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 앞에 붙은 매물 안내를 들여다보며 ‘이 동네는 얼마나 하나’하고 생각하는 습관이다. 하루하루의 삶이 버거운 사람들에게는 부동산 문제란, ‘내 집 값 올려 달라’는 욕망이 아니라 ‘내가 살 곳이 제발 있기를’ 하는 애원에 가깝다.
단칸방에 몸을 뉘이고, 반지하 셋방에 신혼집을 차리고, 새우깡 한 봉지에 소주를 마셔도 젊음이 있기에 좋다는 어른들의 말은 틀렸다. 다른 것이 아니라 단단히 잘못되고 틀린 말이다. 아무리 젊어도 삶은 힘들다. 힘든 건 힘든 거고, 어려운 건 어려운 거다. 그걸 예쁘게 포장하는 것은, 추억에 대한 미화나, 나아지지 않을 현실에 대한 부정일 뿐이다. 첫 독립 이후 열 차례에 가까운 이사를 하며 10년 동안 나만의 역사를 썼다. 내 ‘이사의 역사’는 앞으로도 끊이지 않고 더 쓰일 것이 분명하다. 이 역사는 끝에 가서 성공한 기록으로 남을까, 아니면 처참하게 몰락한 어느 떠돌이 반란군의 기억으로 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