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다닐 때 매년 새 학기가 시작되면 가정통신문과 함께 꼭 집에 가져가서 작성해 오라던 종이를 한 장 받았다. 한글 이름과 한자 이름, 출생일, 키와 몸무게 등을 맨 위에 적던 그 종이에는 항상 부모의 직업을 적어야 했다. 엄마의 직업란에는 가정주부라고 쉽게 적을 수 있었지만, 아버지의 직업란을 적을 때는 매번 고민했다. ‘사업’이라고 적으면 뭔가 거창하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고, ‘자영업’이라고 적기에는 개인 점포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애매했다. 종이를 함께 앞에 놓고 앉아있던 엄마는 그 몇 자 적는 것을 신중하게 고민했다. 그냥 대충 적으면 되는 것을, 왜 그렇게 고민하고 적어야 했는지 그때는 몰랐다.
나이가 더 들고서야 알았다. 부모의 직업은 그 어린 초등학생이 달고 있는 일종의 표식이었다. 학생들이 서로를 보기 위해서가 아닌, 주변의 어른들이 주로 보는 안내판이었다. 모인 종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같은 반 학생들의 비상 연락망에는 부모의 직업과 나이까지 적힌 채 40명 조금 넘는 학생들의 가정으로 발송됐다. 아이들을 매개로 만난 부모들은 자신들의 이름보다는 A아빠나 B엄마처럼 아이들의 이름을 붙여 불렸다. 나이나 학번이나 직급 등으로 형성되는 개인적 자아와는 전혀 무관한 자녀의 자녀에 의한 자녀를 위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학부모회 등으로 모인 부모들은 서로의 직업과 아이들 간의 친분을 적당히 조율하며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었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직업을 알게 되면 아이들은 또다시 의사아빠를 둔 A, 공무원 엄마를 둔 B 등으로 인식됐다. 좋은 직업을 가진 부모의 아이가 공부까지 잘하기라도 하면, 그 아이와 부모는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 됐다. 자신의 아이에게 “너도 A랑 좀 친하게 지내.”라는 식의 이야기를 몇 부모가 하는 순간, 그 아이는 또래 무리의 중심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 아이가 다니는 학원, 그 부모가 사는 동네, 그 아이의 가정교사까지 내 아이에게 똑같이 붙여주고자 노력하는 부모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부모의 번듯한 직업은 못된 일부 교사들이 악용하기에도 좋았다. 그들은 대놓고 학생들을 차별대우했다. 학부모들과 모이는 자리에서 일부 아이들을 유난히 칭찬하고 추켜세우며 그 부모들에게 선심을 사려 애썼다. 잘은 몰라도 아마 무료 법률상담이나 대학병원 빠른 예약 등의 혜택도 겸사겸사 누리지 않았을까 싶다. 교육의 대상인 아이들을 차별하며, 교사들은 검사나 교수 같은 직업을 가진 부모들에게는 그 덕을 누려보려 했고, 사회적인 힘이 조금 적더라도 넉넉해 보이는 직업을 가진 부모들에게는 금전적인 이득을 취하려 했다.
아주 어린 나이었기에 기억이 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한 담임교사는 나를 공공연하게 무시하며, “어디서 저런 덜떨어진 게 들어왔냐.”며 흉을 봤다고 한다. 부모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그 태도는 여전해서, 엄마는 내가 정말로 어딘가 부족한 줄 알고 학교를 1년 늦게 보냈어야 했나 후회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꼴을 보다 못한 다른 학부모가 엄마에게 귀띔을 해줬다. 서울에서 오셔서 그런지 세상물정을 모르시냐며, 한 달에 딱 30만 원씩 3개월만 가져다주면 해결된다고 말이다. 『좋은 생각』이라는 월간지 사이에 꽂아 가져다주라는 팁도 덧붙였다.
면담을 신청한 엄마가 월간지를 가져다준 날, 그 교사는 책을 받아 서랍에 넣으며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 아드님이 너무 똑똑해요. 저는 천재인 줄 알았다니까요.”
엄마는 그때의 굴욕감과 자괴감이 너무 심해, 그 뒤로 돈을 더 갖다 바치지 않았다. 다른 학부모가 귀띔해 주었던 ‘싯가’에는 부족했지만, 어쨌든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일까. 그 교사는 그 뒤로 더는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성인이 된 내게는 아주 희미하게 남은, 20년도 더 된 어린 시절의 일이지만, 아직도 엄마는 그 교사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찾아내서 응징할 것도 아니면서 그런 걸 다 기억하고 계시냐고 물었더니 짜증이 나서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고 나쁜 것이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학기 초에 적어 낸 종이의 아버지 직업란에 ‘사업’이라고 적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만 남는다.
아이들을 차별하거나 금품을 챙기던 초등학교 교사의 이야기는 최근에야 들었지만, 사실 어릴 때에도 직업이라는 것이 한 사람을 규정하는 데에 얼마나 편리한 도구로 사용되는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굳이 앞에 앉혀두고 “D는 좋은 거야.”라고 가르치지 않더라도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어른들의 말과 표정은 아이들에게 가르침이 되었다. 공공장소에서 누군가 트림을 하며 이를 쑤시면 다른 사람들은 인상을 쓰거나 손가락질을 했다. 누군가 킹크랩이나 한우를 사겠다고 하면, 상대방은 밝은 표정으로 반겼다. 그 모습을 하나하나 관찰하며, 아이들은 공공장소에서 하면 안 되는 행위나 사람들이 좋은 것이라 여기는 음식을 알게 된다. 직업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좋은 직업’과 ‘나쁜 직업’에 대한 선입견이 생겼다.
어린 시절, 스튜어디스나 의사가 되겠다는 아이들은 많았지만 환경미화원이나 배달기사가 되겠다는 아이들은 드물었다. 이이들의 열에 하나는 선생님이 되겠다 했고, 또 다른 하나는 연예인이, 또 다른 하나는 운동선수가 되겠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그 비율은 다른 반도 얼추 비슷했다. 글쎄, 그게 과연 자신이 하고 싶다 생각하는 일이었을까. 막연하게 동경하는, 그것도 주위의 어른이 주입한 동경심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장래희망이 아니었을까. 딱 한 번 환경미화원이 되겠다는 친구를 본 적 있는데, 자신의 아버지를 무척 자랑스러워하던 환경미화원의 아들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멋있어 보였다.
부모의 직업을 적던 그 종이에는 나의 장래희망을 적는 란도 있었다. 재밌는 것은 내가 희망하는 진로와 부모가 희망하는 진로를 모두 적어야 했다는 점이다. 얼마 전, 학창 시절 생활기록부를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초중고 기록을 모두 발급받은 적이 있다. 그리고 세 종의 pdf 파일을 보며 혼자 실컷 웃었다. 내가 희망한 진로는 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한결같았는데, 내 부모가 적은 희망진로는 해마다 달랐다. ‘사학자’ 내지 ‘역사교사’를 꿈꾸는 나를 설득하기 위해 부모님은 의사와 교사, 공무원과 기자까지 본인들이 생각하는 ‘자식이 했으면 하는 일’을 바꾸어가며 적었다. 꺾이지 않던 자식과 자식을 꺾으려던 부모가 썼던 투쟁의 기록이 기억도 못하던 곳에 그렇게 남아있었다.
장래희망 때문에 적지 않은 잔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내가 좋아하던 책(심지어 만화책도 아닌 인문학 서적이었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던 엄마의 모습도, 성적표를 받아 들고 밥상을 엎어버린 아버지의 모습도 기억난다. 공부 열심히 하고, 유명한 대학에 가서 번듯한 직업을 가져야만 한다고 강요받는 삶이었다. 내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때에 학교를 다녔던 거의 모든 이의 삶이 그랬다. 아마 우리 윗세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요즘 아이들에게도 같은 것이다. 세상이 얼마나 많은 학교와 직업과 전공이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가 알아야만 했던 대학은 ‘SKY’로 시작하는 열댓 개 남짓이었고, 가고 싶어 하는 학과는 취업을 기준으로 선택되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결국 내가 가고 싶어 하던 학과에 입학했다. 반수를 거치며 간 두 번째 대학이었고, 그즈음에는 부모님도 반쯤은 포기한 상태였지만 어쨌든 어릴 때부터 꿈꾸던 학과를 전공하게 되었다. 4년, 군대까지 합치면 6년을 다닌 대학생활은 즐거웠다. 역시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능률이 오르는 법인지, 죽어라 공부해도 오르지 않던 고등학생 시절 수학 점수와는 다르게, 거의 매일 취하고 별로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던 대학 시절의 학점은 꽤나 높았다. 고시 공부하던 친구들을 붙잡고 막걸리를 먹자고 꼬시던 대학시절을 거쳐, 나도 취업을 했다. 물론, 학과와 전혀 무관하고 어린 시절 장래희망과도 완전히 다른 직업이다.
얼마 전, 내가 졸업한 과의 신입생들에게 먼저 졸업한 선배로써 취·창업 특강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일단 하겠노라 승낙했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들려주어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특강을 요청한 학생회 후배들은 그냥 편하게 하고 싶은 얘기와 취업 과정 등을 들려주면 된다고 했다. 몇 년 만에 찾은 학교에서, 3-40명가량 모여 있던 학생들에게 말했다. 어차피 여러분이 하고 싶다고 무조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의 전공이 직업으로 직결되는 것도 아니라고. 여러분 얼굴 처음 보며 스스로 선배라고 자처하는 것이 부끄럽지만, 내가 아는 여러분 선배들 중 전공을 살리거나 꿈을 이룬 사람을 찾는 것은 무척 어렵다고. 그렇지만 각자의 삶을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나름 멋있고 각기 만족하는 삶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건 열 살가량 어린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여전히 고민하고 번민하는 오늘의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다양하다는 것을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직업의 종류가 이렇게 많다는 것도, 중간에 경로를 바꿔도 괜찮고, 얼마든지 다시 도전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걸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어땠을까.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의 재밌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며 지킬 것도, 잃을 것도 많아지면서 선택지를 고를 용기는 줄어들지만, 여전히 세상은 넓고 삶은 다채로우며 선택지는 다양하다. 서른 즈음의 내게 또 다른 선택과 기회들이 생길 거라 믿는다. 평균연령은 계속 늘어난다는데, ‘너무 늦었다’고 말할 수 있는 마지노선도 점점 늦추어지겠지. 장래희망을 적어내라는 종이도 없으니, 에라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