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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스꾸 May 17. 2023

불길 속이라도

인터뷰어 지은 / 포토그래퍼 졔졔



* 준이 님과의 인터뷰입니다.






좋아하는 계절이 있나요?


    저는 겨울을 제일 좋아해요. 겨울은 제가 사랑하는 것들로 가득 차있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크리스마스, 새해, 제 생일이 다 겨울이구요. (웃음) 그리고 눈을 사랑하고, 산타, 연말, 목도리, 니트, 캐롤, 새파래 보일 정도로 추운 날씨, 노곤노곤해지는 감각. 이런 온갖 걸 다 좋아해요.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26일부터 새해인 1월 1일까지의 그 일주일도 되게 좋아하구요. 뭔가 미묘하고 이상한 기간인 것 같아요. 사실 모든 순간이 그렇지만, 이 연말이 돌아오려면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게 유독 실감이 난다고 해야 할까요. 별거 아니지만 제가 원래 예쁜 스티커나 편지지를 아껴두는 편인데 크리스마스 관련 편지지나 스티커는 마구마구 쓰게 되더라구요. 그렇게 아끼지 않고 표현할 수 있는 마음이 들도록 만들어줘서, 겨울이 좋아요.



요새 자주 듣는 음악이나 자주 보는 글이 있나요?


    밴드 라쿠나를 좋아해요. 20년에 발매된, ‘오렌지의 계절’이라는 라쿠나의 노래가 있어요. 그 노래를 정말  좋아해요. 특히 불안할 때 그 노래를 자주 들어요. 불안할 때는 숫자를 세면 무거운 마음이 조금이나마 덜어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정적 속에서 혼자 숫자를 세는 것보단 주저 없이 나아가는 박자와 함께 세는 게 아무래도 수월하더라구요. 불안할 때는 심장 소리가 유독 빠르게 뛰는 게 제 자신한테 크게 들려요. 그래서 혼자 숫자를 세다 보면 빨리 뛰는 제 심장에 오히려 끌려가게 돼요.


    이 노래 저 노래 많이 들으며 시도해 봤는데, 그중 가장 제가 따라가기 편했던 곡이 ‘오렌지의 계절’이었어요. 이 밴드의 보컬리스트도 어릴 때부터 숫자 세는 게 습관이었대요. 그래선지 이 곡의 템포가 제가 가장 편하게 생각하는 심장 소리와 닮은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고 또 스스로에게 의미가 깊은 시집은 김소연 시인의 <i에게>인데, 표제작을 시작하는 첫 문장을 제일 좋아해요.


'밥만 먹어도 내가 참 모질다고 느껴진다 너는 어떠니'


이걸 처음 읽었을 때의 저도 제 스스로를 참 모질다고 느꼈거든요. 밥만 먹어도.

 

    저는 제멋대로 해석하는 게 좋아요. 어느 날 잠 안 오는 밤에 가수 하현상의 노래를 듣다가 해둔 메모가 있어요. ‘시집 한 권을 읽으면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같다’. 그 시인의 인생이라고까지 말하긴 거창한데 아무튼 시인의 일상을 영화 한 편으로 표현한 것처럼 느껴져요. 하지만 시집의 엔딩 크레딧에는 부연 설명이나 해석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저는 시집을 읽고 또 읽으면서 저만의 해석을 키워가는데, 시인의 의도라거나 해설 같은 걸 알고 있었다면 그 해석들이 이렇게까지 풍부해지지 않았을 것 같아요. 특히 시에는, 그 문장이 진짜 어떤 의미인지에 정답이 없으니까요.



바쁜 일상 속에서 나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 있나요?


    그냥 제가 무얼 원하는지에 항상 집중하고 또 되새기려 해요. 사실 제가 지금 벌여 놓은 일들이 많은데, 다 제가 원해서 선택하고 시작한 일들이거든요. 저는 오랫동안 제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왔지만, 그래도 자책은 최대한 안 하려고 해요. 이게 저를 지키려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최근에 깨달은 건데, ‘내가 왜 그랬지’ 라는 말의 힘이 진짜 큰 것 같아요. 무서울 만큼. 내가 그때 왜 그랬지, 내가 그때 이런 선택을 안 했다면, 이런 생각들을 많이 했는데 그게 끝도 없이 저를 과거로 끌고 가더라고요. 이건 끝이 없는 말이고 질문이니까 이게 진짜 쓸모없는 생각이란 걸 불현듯 깨달았던 것 같아요. 우연히. ‘그만해야겠다’ 고 메모장에 써뒀어요. 아니었으면 그냥 생각만 하고 잊었을 텐데 손으로 쓰고 나니까 계속 기억하고 되새기게 되더라고요. 그 후론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도 금방 빠져나올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준이씨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요?


    최근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오렌지의 계절’이란 노래를 들으면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요즘 날이 되게 좋잖아요. 나무도 막 초록색이고, 하늘을 보면서 ‘내가 지금 파도 앞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사실 저는 제 자신과 제 감정에 집중하면서 이것저것 메모를 많이 해요. 좋아하는 친구들, 친구들과 놀러 간 곳의 풍경, 저를 살게 하는 음악들, 그 음악을 현장에서 들을 때의 울림, 심란할 때 나를 더 심란하게 만들어줄 텍스트 그리고  나를 그 순간에 집중하게 하는 시집들, 제가 상상하는 그 시집의 엔딩 크레딧같은 노래, 이런 사소한 모든 게 결국 영감이 되는 것 같아요.



지금 시점의 나에게 미술은 어떤 의미예요?


    싫습니다. (웃음) 미술 너무 싫고 어려운데 그래도 좋아요. 물론 현대미술은 너무 어렵고 그래서 종종 스트레스도 받고, 아마 졸업하면 미술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저는 미술을 공부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운 것 같아요. 제 스스로의 것들이 구체화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고 작품들을 보면서 제가 느낀 감정들, 또 제가 스스로 그림을 그리면서 느낀 것들은 무언가로 치환되진 못해도 저에게 중요한 경험들이었어요.  저는 졸업해서 미술을 하지 않더라도 저는 계속 예술의 범주 내에서 살아갈 것 같은데, 저는 창작가 스스로를 표현해 내는 예술들 사이에는 공통되는 점들, 서로 연결되는 점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미술을 공부하며 배운 것들이 앞으로도 저에게 유효한 도움을 줄 것 같아요.






    입학하던 2019년의 제가 지금의 저를 본다면 많이 놀랄 것 같아요. 상상도 못했을 거예요. 몇 년 동안 상상만 하며 미련 가지던 일에 도전하고 있거든요. 저는 과감하지 못한 사람이에요. 20, 21살까지는 그런 성격이 더 심할 때여서 계속 발걸음을 주저하기만 했죠. 그때는 제가 뭘 좋아하는지도 잘 몰랐고, 이것저것 관심은 있는데 해볼 용기가 없었거든요. 또, 스무 살엔 전혀 관심 없었던 것들을 지금은 사랑하고 있어요. 시, 락 음악, 커피 등등. 제 취향을 깨달았다고 말하는 게 맞겠죠. 한창 힘들었던 시기의 제 그림은 검정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푸른색으로 가득하구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검정으로 가득 차기 전의 제 그림에는 뚜렷한 색깔이 없었어요. 검정이 가득하던 그 시기는 정말 힘들었지만 오히려 그 힘듦으로 인해 저는 깨달은 것이 있고, 도전할 용기도 얻었어요.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지만 그 당시의 저에게는 잘 버텨냈고 수고했다고, 그때의 제가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말해주고 싶네요. 그 과정 속에서 겪었던 방황이 남들의 시선에선 실패겠지만 저는 그게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하튼 19년, 20년도의 제가 지금의 저를 본다면 조금이나마 더 과감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당시의 저에게 뭔가 말해줄 수 있다면, 겁먹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선생님께서 작년 말 저에게, ‘네가 한 선택 중 잘못된 건 단 하나도 없어’라고 말씀해 주신 적이 있는데, 그게 계속 마음에 남아요. 스스로 깨치려 노력했지만 잘 안됐거든요, 그런데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들으면 아무리 뻔한 말, 알고 있던 말이어도 힘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그때의 저는 모든 걸 참으며 지냈거든요. 하고 싶은 것도, 아픈 것도요. 너 그거 아픈 거야, 이상한 거야, 말해줄 사람이 필요했다고 생각해요.






올해를 어떻게 보내고 싶나요?


    준비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올해 초에는 저에게 기적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고, 제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다면 저는 지금보다 더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도 생각했어요. 과거의 저를 자책하고 싶은 맘은 없지만 작년을 되돌아보면 저는 자주 미뤘고 안심하면서 동시에 체념했던 것 같아요. ‘언젠가 되겠지’ 싶었던 건지 혹은 ‘어차피 안될 건데’ 싶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기회가 오면 비벼볼 수라도 있게끔 제 스스로를 만들고 싶어요.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하며 기회를 피하기보단 일단 부딪혀 보고 싶어요. 여기저기 많이 나서보고.


    오늘 시인 유희경 선생님께 ‘문장이 탐이 날 만큼 감각적’이라는 칭찬을 들었거든요. 이건 20대의 전유물이라는 말씀과 함께요. 20대에는 모든 게 열려있으니까, 이때만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거죠. 그래서 지금부터 계속해서 좀 많이 써놓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하는 생각이나 경험을 뭐라도 더 남겨놓고 싶어요. 나중엔 이게 안 나올 수도 있으니까.


    되게 기분 이상하네요. 아직 5월인데 12월까지 상상하고 나니 스스로에게 편지를 쓰는 것 같아요. 여하튼 저는 제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행복은 찰나에 불과하니까 지속적일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말이라도 해봅니다. 저는 제가 행복하길 바라요.

 

    좋게 살고 싶어요.

행복해 보였으면 좋겠어요. 외로워도 행복해 보였으면 좋겠어요. 괴로워도 슬퍼도, (웃음) 안 울 순 없어도, 행복해 보였으면 좋겠어요. 불길 속이라도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인터뷰어 지은 / 포토그래퍼 졔졔

2023.05.09 준이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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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s of skku]
휴스꾸(Humans of skku)는 2013년부터 성균관대학교의 교수, 직원, 학생과 근처 상권까지 인터뷰 대상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장문의 인터뷰 본문, 깊이 있는 사진과 휴스꾸를 꾸려나가는 운영진의 이야기까지 다채로운 휴스꾸의 모습을 담아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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