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가 되어보기로 했다.
유서(遺書)
이젠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이 온 것 같다. 짧았던 나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적어도 석 달 이상은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더 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거치며 사랑받고 싶었는데... 그건 욕심이었다.
한때 난 생고무에 가소제를 넉넉히 넣은 뽀얗고 말랑망랑한 속살을 가졌었다. 색은 또 얼마나 은은했다고. 연필 자국을 지울 때마다 가루가 크게 뭉쳐지는, 그래서 엄청난 양의 똥이 배출되는 톰보(TOMBOW) 따윈 내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나는 적당하게 부드러웠고 냄새도 없었으며 깔끔한 작업 환경을 마련해주는 썩 괜찮은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는 나의 수명이 다했다는 걸 안다. 도대체 지금의 내 몰골을 보고 어떻게 나의 존재를 알아차린단 말인가!
나에게도 꿈이 있었다. 둥근 직사각형의 내 몸체를 최대한 유지한 채 사이즈가 작아지는 것. 이것이 왜 그리도 어렵단 말인가~ ㅠㅠ 이느므 초딩들. 니들의 화풀이 대상이 왜 꼭 나여야 했는가. 왜 서로 던지고, 찌르고, 심지어는 반 토막을 내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냐. 아~ 내 꿈!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하자. 부디 입사 동기인 그녀에게만은 내 사인(死因)을 비밀로 해주길 바란다. 그녀가 알면 PTSD가 올 수 있으니 제발 이것만은 약속해라. 잠시나마 모모, 너의 공간에서 지낼 수 있어서 행복했다. 부디 안녕!
(윽... 내 몸뚱이에 박힌 10개의 샤프심. 이젠 모르핀 주사도 소용없구나.... 안녕.)
2018년 5월 30일 OOO
#네이버블로그: 모모의 심리상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