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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유 Oct 02. 2024

[6]

이글이글 불 타 오르는 것만 같던 여름이 지나 2학기가 되었다. 신입생이 맞는 대학교의 2학기는 1학기에 비하면 사뭇 고요했다. 학교 축제와 전체 체육대회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행사가 없었다. 아! 형사모의재판에서 검사 역을 맡게 되었다. 술자리에 빠지지 않았던 이미지 때문인지 학기 초부터 형사모의재판 참여가 기정 사실화 되어 있었다. 선배들은 모의재판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그 내용을 미리 알게 되면 거부할 수 있으니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던 것이다. 모의재판의 정보가 없으니 때가 되면 하겠거니, 법학도의 '실습'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2학기 개강을 함과 동시에 출연자들을 소집하여 대사를 읽어보게 하고 역할이 주어졌다. 나는 보기와 다르게 목소리에서 무게감이 느껴진다며 검사 역할을 맡았다.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느릿느릿 읽다 보니 무게감 있게 전달된 것 같았다. 1학기는 저녁을 술자리와 함께 했다면, 2학기는 가장 큰 행사인 형사모의재판 연습으로 동기들, 선배들과 함께 빈 강의실에서 보냈다. 재학 중인 선배들은 매일 저녁 돌아가며 밥을 사 주었다. 인원이 상당했기 때문에 저녁 식사에 약 8만 원~10만 원 정도가 소요되는데 그만큼 성공적인 모의재판을 응원하는 마음이 컸다(당시에 순대국밥이 3,5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형은 저녁에 다른 과 지인들과 술자리가 많았고 틈틈이 농구도 열심히 했다. 형은 지나가는 길에도 강의실에 들러서 응원을 해 주었다. 다른 선배들이 오면 어렵고 부담이 되어서 연습을 잘하지 못했는데 형이 오는 날에는 더 힘이 나고 준비한 내용을 잘 보여주고 싶었다. 연습을 하다 쉬는 시간이 되면 형은 후배 한 명 한 명 찾아가며 잘하고 있다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형은 어느 날 모의재판을 준비하는 후배들 밥을 사주려고 강의실을 찾았다.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 밑에 살이 접히지만 눈은 그대로인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덩치에 맞지 않게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인사를 한다. 후배들이 많아서 긴장한 듯했다. 아니면 얇아질 지갑을 생각하니 쓴웃음이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다 같이 모여서 바닥에 짜장면, 짬뽕, 볶음밥, 탕수육 등 푸짐하게 깔린 음식을 허겁지겁 먹었다. 한참 식사를 하는 중에 형이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이자 다른 선배가 이를 알아채고 자리를 깔아준다.


"희찬 선배, 한 말씀해 주세요."


형은 쑥스러워하며 얘기했다.


"내가 신입생일 때 형사모의재판에 참여하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열심히 준비하는 후배들을 보니 자랑스럽다. 그리고 오늘은..."


형은 연습하는 모습을 보니 오늘은 충분한 것 같다며 나가서 소주 한잔 하자고 했다. 형 보다 학번이 높았던 모의재판 총괄 선배는 우리들의 눈빛을 한 번씩 훑어보더니 집에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아서 한잔 하자고 했다. 마른땅에 가랑비가 내리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휴식이 필요했고 형은 후배들이 보고 싶었다. 그 길로 학교 앞 정문으로 가서 서로 막걸리를 부어댔고 기억은 기분 좋게 끊겼다.


가을에 열린 형사모의재판은 신입생과 졸업생, 교수님들의 성화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모두가 얼마나 많이 연습을 했는지, 대사가 기억나지 않더라도 의미 전달에는 문제가 없을 만큼 자연스럽게 대처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목을 받는다는 것이 나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임을 그때 알았다. 모의재판 당일은 연습과 달리 매우 긴장되었고, 머리가 텅 비어 대본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아직도 무대에서의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2학기 기말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도서관은 밤새도록 밝은 빛을 뿜었고 공부 열기가 후끈 달아오를 때, 웃지 못하는 부류가 있다. 기말고사를 마치면 입대를 해야 하는 신입생들이다. 가장 친했던 동기 두 명 중 한 명이 같은 과 여자친구와 약 1주일의 연애를 하다 차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말고사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이었고, 제대로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끝난 인생 첫 연애에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현실 도피를 위해 방법을 알아보던 친구는 '동반입대'가 가장 빠르게 입대할 수 있음을 알아냈다. 그리고 이미 입대 날짜가 나온 나를 건너 뛰고 다른 친구에게 동반입대를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잠시 고민을 하던 친구는 그 자리에서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동의를 했다. 우리 셋은 그 길로 pc방으로 달려갔고 두 친구는 병무청 홈페이지를 접속해 동반입대 신청을 했다. 얼마 후 날짜가 나왔는데 12월 초다. 약 2주 후 입대였다. 그것도 기말고사가 한창인 시기의 중간이었다. 결국 친구들은 출석률 100%로 정성을 들였던 몇 과목은 시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2학기를 마무리했다.


친구들이 입대하는 날 11시 즈음에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 너머에는 친구들의 목소가 들렸다. 흥분과 절망이 섞인 목소리는 건강하게 다녀와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이었다. 나도 곧 갈 테니 몸조심하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미니미 삼총사로 불렸던 우리는 두 명이 동반입대를 하고, 나는 1월 초에 입대 예정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나가는 시기에 많은 학생들과 행사로 에너지가 넘쳐나던 학교는 한산해졌고, 친구들이 없는 학교는 쓸쓸했다. 더욱이 새 해가 되는 순간 나 역시 입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1학년이 끝나가는 시점에 같은 과 동기 여학생과 1주일의 연애를 한 친구. 1학년을 마치면 입대를 선언한 내 친구의 구애를 잠깐 허락한 동기 여학생. 연인과 이별한 친구를 위해서 기말고사 시험 절반을 포기하고 동반입대를 마다하지 않은 또 다른 친구. 그 시절 그때는 그런 낭만 아닌 낭만이 있었다.


2학기 기말고사를 앞둔 어느 날, 학교 앞 정문에서 펼쳐진 술자리에서 여전히 군대 얘기가 쏟아져 나왔다. 예비역 선배들은 온갖 무용담을 쏟아냈고, 서로 공감하며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군인 계급도 제대로 알지 못하던 나는 머릿속으로 TV에서 보았던 이런저런 장면들을 꾀어 맞추며 상상했지만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선배들은 나를 보며 안타까움과 알 수 없는 승리감에 도취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등병과 일병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강조했다. 


"남들도 잘만 해 내는 것이니까 너도 잘할 수 있다! 형들이 살아있는 증인이지 않느냐! 전역 한 형들을 생각하면서 끝까지 참고 버텨라! 너도 이 날이 온다."


선배들의 현란한 군생활 이야기에 형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형이 일병인 시절에 이등병 후임이 형에게 드릴 말씀이 있다며, 행동이 빠른 형에게 조금만 천천히 움직이시면 안 되냐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등병이 더 빨리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선임에게 천천히 움직여달라고 했다는 사실에 모두가 웃음이 터졌다. 한 편으로는 형이 얼마나 빠릿빠릿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등병을 혼 낼 법도 한데 형은 내무생활에서 이등병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전역하는 그날까지 S급 병사였음을 강조했다. 다른 선배들도 대부분이 희찬이는 왠지 그랬을 것 같다며 악마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천사인 선임이었음에 동의했다.


당시에는 알 수 없는 얘기들이 잔뜩이었지만 일단 참아야 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형과 같은 선임을 만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은 나에게 운전병을 추천했다. 형이 두돈반 운전병 출신이고 일과는 힘들지만 훈련은 그럭저럭 버틸만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보병, 포병, 통신병, 헌병, CP병, 1호차 운전병, 보일러병 등 다양한 보직이 나왔고 서로의 무용담은 다시 시작되었다. 운전병은 전쟁이 일어나면 저격당하기 쉽고 5분 대기조로 가면 고생을 많이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형이 추천해 준 운전병이 끌렸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자격증이라고는 운전면허증이 전부였다. 당시에는 입영신청을 하면 입대 날짜가 몇 개월 후로 바로 지정이 되었기 때문에 학기 중에 신청을 해서 방학 중에 입대를 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입영신청을 하고 날짜가 나왔다. 1월 2일. 그리고 보직은 운전병으로 확정되었다. 당시에는 운전병이 부족해서 모집을 많이 했었고, 다행히도 방학 기간에 입대가 가능했다. 이 소식을 형에게도 알렸다. 형은 쉬는 기간 없이 바로 복학이 가능해서 참 다행이라고 했다. 운전병이 확정 됐다는 소식을 전했는데 형은 조금 걱정이 된다는 얘기를 꺼냈다. 형의 어머니께 내 얘기를 했더니 어머니께서 동생한테 괜한 얘기를 했다며, 힘든 운전병을 추천했다고 한 말씀 들으신 모양이었다. 입대하면 모든 보직이 고생을 하지만, 형이 운전병으로 고생한 이야기를 들으셨을 어머니께서 마음이 편치 않으셨던 것 같다. 형도 다시 생각하니 괜히 추천한 것 같다며 두돈반은 덩치도 크고 정비도 쉽지 않아 힘이 세야 하는데 왜소한 나를 보니 걱정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두돈반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나는 아무런 걱정이 되지 않았다. 선배들의 말처럼 모두가 잘 해내는데 나라고 못할 것 없다고 생각했다. 아는 바가 없으니 무엇을 걱정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내가 기분이 좋았던 것은 형이 형의 가족에게 내 이야기를 했다는 점이었다. 형의 가족이 나라는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이 기뻤고 영광스러웠다. 형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선배가 아닌 친 형과 같은 친근함이 느껴졌다. 형의 리더십, 통솔력, 추진력, 사람을 아끼는 마음, 신세를 지면 갚을 줄 아는, 지갑이 얇더라도 열어야 하는 때를 아는 형의 모습을 가까이 보면서 나 역시 배운 게 많았다. 나에게 형은 더 이상 선배가 아닌 배울 점이 많은 스승이었고, 나는 한 사람의 팬이 되었다.


새해가 되니 모두가 축제 분위기였지만 우리 집만은 초상집이나 다름이 없었다. 친구들은 미용실까지 함께 해 주었고 늦은 시간까지 우울한 미래를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리를 빡빡 밀고 나타난 나를 보고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하셨다. 이제야 적응이 될 것만 같은 사회를 뒤로 하고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 순간이 온 것이다. 다시 무를 수도 없고, 넘쳐나는 에너지를 쏟아붓고 싶은 시기였기에 직접 경험하고 느끼면 분명 배울 점도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라는 말은 괜한 얘기가 아님을 알았다. 육체적 고됨이 있어야만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었다. 전국에서 모인 훈련소 동기들은 모두가 다양했고, 그 안에서 서로 챙겨주고 배려하며 웃음꽃이 피었다. 특히 물이 부족하여 샤워와 대소변을 보는 것이 제한적이었고, 대부분이 변비로 고생을 많이 했다. 우리 중대는 구막사를 사용했기에 차디 찬 냉기를 막고자 모든 창문은 비닐로 막았다. 낮에는 종일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굴렀고 밤에는 환기가 잘 되지 않은 곳에서 떠 다니는 흙먼지를 산소 삼아 들이켰다. 아침이면 피를 토하는 사람도 있었고 밤새 마신 검은 흙먼지를 뱉어 내느라 토악질을 해 댔다.


훈련소에서 가장 기다리던 시간은 주말마다 편지를 나눠주는 순간이다. 편지를 나눠줄 때 이름이 호명되면 모두가 환호성을 내 질러 축하해 주었다. 당사자는 세상을 얻은 것 마냥 기뻤지만, 기다리는 편지가 오지 않은 동기들도 많았기에 얼른 품에 숨겨 자리로 돌아가 조용히 읽었다. 마침내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가족들의 편지 사이에 예상치 못하게 A4용지 한 장이 껴 있었다. 그때는 부대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를 통해 편지를 쓰면 출력해서 훈련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형이 이를 통해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인터넷 카페를 잘 알지 못했던 나는 우표가 붙어 있는 봉투에 담긴 편지가 아니라서 당황했지만 시원시원한 성격의 형을 생각하면 A4 용지로 출력된 편지가 오히려 더 형 답다고 생각했다.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고맙고 감사한 순간이었다. 형은 여전히 운전병을 추천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길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다치지 말고 건강히 잘 버텨 내라는 말에 무사히 전역하고 복학했던 형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그때 형의 모습을 나도 따라갈 수 있도록 참고 또 참아 내겠다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의 시계는 간다더니, 마침내 내게도 그날이 왔다. 내가 전역한 그날 저녁 가족 모두가 모여 축하해 주는 식사 자리에서 사촌 동생이 책 한 권을 선물해 주었다.


"수현아 고마워. 잘 볼게"


여전히 군복을 입고 있고, 오전까지만 해도 부대에 있었던 내가 굵고 큰 절도 있는 목소리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 모두가 깜짝 놀라 당황해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에겐 익숙한 것들이 사회에서는 어색한 것이었다. 순간 형 생각이 났다. 막 전역해서 사회생활이 어색하다고 했던 형이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싶었다. 눈빛은 밝게 빛나다 못해 이글이글 타 오르는 것 같은데 말과 행동은 조심스럽던 형. 내 군 생활의 시작과 끝에는 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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