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해는 떠 올랐고 일요일 역시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왔다.
눈을 뜨자마자 스트레칭을 하며 몸 컨디션을 확인한다. 창 밖으로 날씨를 확인하고 장비를 챙긴다. 장비라고 해 봐야 겨우 반바지를 입을지 긴바지를 입을지 고르는 것뿐이다. 축구양말과 정강이 보호대는 필수. 축구화 1개와 풋살화 1개를 담은 가방을 짊어지고 개미소리로 문을 열어 집을 나선다. 축구 경기를 하다 축구화가 상해서 신지 못할 경우가 있으니 언제나 여분으로 풋살화까지 챙긴다. 또한 운동장 상태에 따라 많이 미끄러우면 풋살화를 신는 것이 볼 컨트롤에 편하다. 달리기 속도는 줄어들지만 정확한 패스와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풋살화가 낫다. 누가 들으면 축구 전문가처럼 보이겠지만 모든 조기축구 회원들은 이론상으로 축구 전문가가 맞다. 장비라도 단단히 갖춰야 폼이 나고 소속감이 물씬 올라온다. 마음만은 언제나 EPL에서 뛰고 있는 국가대표다. 실력은 그다음. 사실은 축구화던, 풋살화던 달리기 속도라고 해 봐야 다들 거기서 거기다. 전문 선수가 아니고서야 주 1회 모여서 운동하는 게 전부인데 느낌이 그렇다는 거다. 하지만 슛과 킥은 차이가 난다. 축구화가 풋살화보다 파워가 더 세다.
경기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음에도 먼저 몸을 풀고 계시는 형님들이 계신다. 형님들로 말할 것 같으면 구력 30년 이상의 곧 환갑을 바라보고 마음만은 태극마크를 달고 있는 50대 국가대표다. 동작 하나하나에 '헛, 헛, 헛, 헛, 헛'을 외치며 기합을 넣으시지만 다리와 기합 소리의 엇박자가 이제는 자연스럽다. 몇 시에 도착하셨는지 여쭤보면 어제저녁부터 연습 중이라고 하시고 빨리빨리 다니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신다. 나 역시 마음은 국가대표지만 여기에선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쉼 없이 운동장을 돌고 계신 또 다른 국가대표 형님이 보인다. 우리 조기회 회장을 역임하셨다가 현재는 고문으로 활동 중이신데 축구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고문님이 볼을 잡으면 그날 경기는 볼 것도 없이 끝난다는 것이었다. 작지만 단단한 체격에 쉬지 않고 운동장을 돌 수 있는 체력이라면 전설이 사실일 것만 같다. 하지만 절대 축구공 근처에서는 볼 수 없는 전설적인 형님이시다.
속속들이 형님, 친구, 동생들이 도착하고 지난밤 EPL 경기를 봤는지 물으며 축구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떤 선수가 못했다는 둥, 1 대 1 골 찬스를 놓친 것을 두고 그걸 못 넣느냐는 둥, 우리 팀 막둥이도 넣을 골이었다는 둥 끝도 없을 이야기들이 웃음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쏟아진다. 이번 주는 참석자가 많은 관계로 기본기 연습을 한 후에 자체 경기를 하기로 했다. 볼 감각을 기르는 터치 훈련과 드리블 훈련, 마지막으로 슈팅 훈련을 마치고 연령별로 인원을 나누어서 팀을 정했다. 조금 더 젊은 평균 나이 약 40세 팀이 득점을 하자 평균 나이 43세 팀의 환갑이신 큰 형님이 한마디 하신다.
"왕년에 우리 막둥이만 한 나이일 때는 1년 365일 중에 설, 추석만 제외하고 359일을 축구했는데 세월이 야속해 아주."
참고로 우리 팀 막둥이는 군 입대를 앞두고 있는 20살이다.
"아! 358일이다. 크리스마스까지는 쉬었어. 크리스천이야. 358일을 위해서 하루 더 가족과 함께 해야지 하하하."
큰 형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평소에 농담도 잘하시고, 나이가 한참 어린 동생들과도 잘 어울리신다. 다른 조기회와 경기를 할 때는 상대팀의 거친 파울이 나오면 누구보다 크게 항의하고 거친 말을 마음껏 쏟아내실 만큼 승부에 진심인 분이시다. 경기가 끝난 후에는 소주와 막걸리를 잊지 않으시고 발그레 한 얼굴로 그날의 경기를 복기하면서 완벽한 주말을 즐기신다. 그런데 크리스천이셨던 것이다.
한참 진행 중인 경기에서 추가 골이 나오지 않자 어디선가 공격과 수비를 바꾸자는 제안이 나왔다. 큰 형님께서 수비에서 공격으로 위치를 바꾸자 상대팀 할 것 없이 적당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왼쪽 높은 위치에서 드리블을 시작한 형님은
"야! 야! 야!"
허공에 대고 아무도 없는 우리 팀을 부르시며 수비를 혼란스럽게 하시고는 헛다리 한 번에 자연스럽게 넘어지는 수비를 제치고 골키퍼와 1 대 1 상황을 만들었다. 눈치 빠른 골키퍼는 한쪽 골대를 깨끗하게 비워 놓고 골을 유도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천둥 번개와도 같은 기합 소리와 큰 동작에 이은 강슛. 멋진 골의 완성은 골키퍼의 다이빙이라고 했던가. 허공을 가르는 것만 같은 골키퍼를 지나친 공은 골대도 한참을 지나쳐 점점 더 멀어져만 가고 말았다. 출렁이는 골대 그물과 함께 모두가 하나의 마음으로 세운 작전이 성공해서 환호성이 터져 나와야 하는데 환호성이 침묵으로 바뀌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슛이 빗나갈 수 없는 거리, 공을 골대 밖으로 차버리는 것이 더 어려운 상황인데 이 어려운 것을 해 내는 남자가 바로 우리 큰 형님이시다. 이 정도의 기술이면 2골을 넣은 것과 다름이 없다.
"아이고, 너무 잘 맞아버렸으. 빗맞았어야 들어가는 건데. 우리는 이런 찬스에서 골을 넣지 않는다고. 매너가 있지 말이야."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한 말씀 더 붙이신다.
"크리스마스에도 축구를 했어야 했는데..."
이어서 동생들이 여기저기에서 거든다.
"그럼요, 이런 건 골을 넣어도 득점으로 인정 안 하죠."
"크리스마스가 잘못했네!"
"그래서 저는 불교 다닙니다."
"석가탄신일 챙겨?"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깝게 발 등에 제대로 얹히셨어요."
"단 하루의 차이가 이렇게 크네요."
"공짜 좋아하면 머리 빠진다고 했습니다."
"누워서 떡 먹으면 체해요."
"그쪽 땅이 울퉁불퉁하니까 조심하세요."
"땅이 잘못했네!"
"발목 안 다치셔서 다행입니다."
"축구공이 세모예요!"
"다들 축구하면서 무슨 멘트 날릴까 연구하고 오냐?"
"축구 연구하고 옵니다."
"공부를 그렇게 했어봐라, 서울대를 갔지!"
"낙성대 다닙니다."
(낙성대는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출생지로 서울대 바로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대학교가 아니다.)
대다수의 회원들이 아마추어다 보니 형님들의 득점은 주로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나온다. 혼전 상황에서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 공이 득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발 등에 맞으면 골키퍼 정면으로 가거나 골대 밖으로 멀리 벗어나기 일쑤다. 그래서 제대로 맞으면 득점이 되지 않는 징크스가 있다. 슛이 빗맞아서 같은 팀까지 속일 만큼의 예측 불가한 상황이 나와야 한다. 빗맞아야 득점이 된다.
또 한바탕 큰 웃음이 지나갔다. 다들 어제 잠은 안 자고 밤새 어떤 멘트를 할지 고민했냐고 묻는다. 별 일 아닌 사소한 일도 한 마디씩 거들다 보면 즐겁고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되어 행복한 기억으로 남는다. 형님 동생 할 것 없이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축구도 사랑하지만 웃고 떠들면서 축구를 즐기는 것을 사랑한다. 그래서 조기회는 사랑이다. 사람이 사랑하지 않고 어찌 살 수 있겠는가. 주말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