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에 맞춰 돌아온 학교가 낯설면서도 반갑다.
군대도 다녀왔겠다, 무엇이든 이뤄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가장 기대되는 행사는 단연코 신입생과 재학생의 축구시합이다. 코 앞으로 다가온 축구시합에 마음이 설렌다는 핑계로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해 학기 초부터 선배, 동기들과 소주를 부어댔다. 축구를 사랑했던 동기들이 대거 복학을 했고 볼에 대한 감각이 있는 선배들도 많았다. 승패는 당연히 정해져 있는 것으로 생각했고, 축구를 잘하는 신입생이 얼마나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에 마음이 들떴다. 우리 과의 축구 유전자를 전수받을만한 후배들을 찾고 양성하는 것이 복학한 선배로서 큰 과제였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날씨와 간밤에 내린 소나기로 곱디고왔던 흙이 물과 섞여 작은 덩어리가 되어 미끄럽게 변했다. 재학생들은 마치 출전이라도 하듯 형형색색 각자의 유니폼과 축구화를 갖춰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간단히 패스를 하며 몸을 풀고 있는데 경기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감에도 신입생들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 조금 신경질적으로 변하려던 찰나. 저 멀리서 질서도 없고, 축 처진 어깨와 구부정한 등,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은 한 무리가 빠른 걸음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걷는 모습만 봐도 운동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고 끈기와 승부욕이라고는 기대하기 힘들었다. 얼굴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억지로 끌려온 것처럼 싫은 티가 역력했다. 경기 시간에 임박해서 나타난 것도 모자라 온몸으로 저항하는 신입생을 보고 재학생들 역시 경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김이 빠졌다. 한데 유니폼을 입은 축구화를 신고 있는 신입생이 한 명 보였다. 단 한 명이.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경기를 시작하고 나니 반바지에 축구화를 신은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운동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었다. 남중, 남고를 졸업하고 군대까지 다녀와 전투력이 강한 조직에서 살아온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극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운동에 진심이었는데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사실이 무너져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심지어 축구를 처음 해 본다는 신입생도 있었다. 지금에야 각자 관심사가 다르고 다양함을 존중하지만 세상 넓은 줄 몰랐던 20대 초반에는 나름대로의 큰 충격이었다.
단 한 명. 유니폼과 축구화를 준비해 온 단 한 명만이 축구를 해 본 티가 났다. 그런데 패스는커녕 혼자서 의미 없는 드리블만 하다가 볼을 빼앗기는 것이었다. 같은 팀 동료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어설픈 개인기를 뽐내기만 할 뿐 축구 경기와는 거리가 먼 플레이였다. 상대편이긴 했지만 팀을 죽이는 의미 없는 드리블을 난발해서는 안된다고 알려주었다. 그럼에도 축구 스타일은 바뀌지 않았고 결과는 재학생의 완승으로 싱겁게 끝이 났다. 가뿐 숨을 몰아쉬는 신입생들과 달리 운동량이 부족하다고 느낀 재학생들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적당히 세안을 하고 다시 모인 뒤풀이 장소에서 축구 얘기가 계속되었다. 선배들은 체육대회 선수로 선발할 신입생을 찾아야 했고 영문을 모르는 후배들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리고 선배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단 한 명에게 집중되었다. 축구의 계보를 잇기 위해서는 신입생 중에서 적임자를 뽑아야 했는데 단 한 명만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 후배와 자리가 가까웠던 나는 축구를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로 잔소리를 시작했다. 혼자 공놀이를 하지 말고 경기를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수비가 많은 곳으로 들어가는 드리블을 해서는 안되고, 공간에 있는 우리 팀원을 잘 살피며 패스를 할 때와 드리블을 할 때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고 꼰대짓을 벌였다. 축구 이야기에 전투력이 최대치로 상승하고 취기가 오른 선배들을 앞에 두고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후배는 세상이라도 잃은듯한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만 할 뿐이었다. 반면에 선배들은 우리 과의 축구 계보를 이어갈 후배이기에 모두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후배는 선배들에게 축구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귀가 따가울 만큼의 잔소리였다. 세상 진지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잡고 테이블 위에 손가락으로 알아보지도 못할 그림을 그리며 설명하는 선배. 저 반대편 자리에서 슛 자세를 보여주는 선배. 수비를 할 때는 공을 뺏으려 하지 말고 실수를 기다리라는 선배. 언뜻 보기에도 동네에서만 먹어줄 실력인 선배들이 쉬지 않고 쏘아대니 급기야 도저히 모르겠다며 머리를 쥐어뜯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축구가 이렇게도 슬픈 스포츠였다.
축구란 무엇인가의 철학적 주제도 등장했고 최종적으로 '축구는 전투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눈물을 보여선 안된다며 후배를 다그쳤고 어느새 콧물까지 흘리던 후배는 축구가 너무 어렵고 슬프다며 손등으로 코를 닦았다. 선배들은 이제 그만 놀리기로 하고 험악했던 분위기를 풀었다. 그리고 각자 포지션과 전술에 대해 또다시 축구 이야기를 시작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 긴 긴 밤이 무사히 지나갔다. 그리고 학교 체육대회에서는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누구의 탓도 하지 않았고 우리들의 축구 무용담과 계보는 계속 전해질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신입생은 군대를 다녀와 복학생이 되어 신입생들과 축구경기에 참여했다. 이번에는 재학생 팀이 되어 나와 같이 뛰게 되었다. 후배는 오랜만에 만난 나를 보더니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그때가 참 즐겁고 재밌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그리고 군대에서도 축구를 많이 배웠는데 이제야 선배들이 그때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알겠다며 여유 있는 플레이를 보였다. 그날 저녁 뒤풀이에서 후배는 울먹이는 신입생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늦은 시간까지 붙잡고 끝나지 않을 축구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렇게 또 우리들의 축구 계보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