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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유 Jan 19. 2024

인마 보래이?

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선배들은 내가 축구와 족구를 좋아하니 군생활이 편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정신을 차려야 하니 1학기 또는 1학년을 마치고 입대하는 것이 좋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무슨 정신을 어떻게 차려야 하는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아차렸다. 1학년을 마치고 입대를 할 요량으로 병무청에 신청을 하자 날짜가 나왔는데 새해가 밝은 다음날이었다. 해가 바뀌는 순간은 거리에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럴과 새해 인사로 항상 들떠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우울함과 긴장감, 알 수 없이 밀려오는 슬픔으로 새해를 맞을 것만 같았다. 심지어 친한 동기는 여자친구와 이별한 슬픔으로 지원을 했는데 입대 날짜가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결국 몇 과목은 시험지를 보지도 못하고 입대를 했다. 그리고 내게도 그날은 오고야 말았고 나는 춘천으로 갔다.


나는 강원도 고성에서 군생활을 하게 되었고 저 산 너머에 북한군이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축구를 하며 나름대로 형, 삼촌들과 보낸 시간이 많기에 잘 적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막상 생활관에서 막내 생활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어 계급장 아래에서 만났다. 나이는 한 두 살 차이지만 계급장에서 느껴지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눈도 마주칠 수 없었고 고개를 드는 것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계급장으로 시작했고 계급장에서 끝이 났다. 너무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정말 무서운 사람들도 많았다. 가장 행복한 시간은 취침소등 후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고, 가장 지옥 같은 시간은 기상나팔 소리에 눈이 떠지는 순간이었다. 


아침마다 각 생활관별로 화장실에 있는 빗자루를 선점하기 위한 소리 없는 전쟁이 펼쳐졌다. 간밤에 틈틈이 뿌려놓은 취침수를 빨리 빼내야 고참들이 전투화를 신고 점호를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기상 5분 전에 자동으로 눈이 떠져서 화장실로 달려 나갈 준비를 했다. 각 생활관의 막내들은 같이 입대한 동기들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적이었다. 다행히 나중에는 마음이 통하여 늦게 온 사람에게 빗자루를 나눠주기도 하면서 고참들에게 혼나지 않도록 지켜주었다. 간발의 차이로 빗자루를 미처 챙기지 못해 취침수를 빼내지 못하는 날에는 환복조차 하지 못하고 빗자루를 이리저리 구하러 다녀야 했고 고참들에게 혼이 나야 했다. 다행히 우리 생활관은 청소도구함에서 가장 가까운 생활관이었기에 가장 먼저 청소도구를 챙길 수 있었다.


처음 한 달 동안은 주말에 축구를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 분대에는 축구를 좋아하는 고참이 없었고 무엇이든 시키면 해야 하는 막내가 생활관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소대와 분대에는 축구를 잘하고 좋아하는 고참들이 많았다. 주말이면 축구하는 고참들이 부러워도 무심한척하는 것이 힘들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나에게도 주말 체육활동이 허락되었다.


축구 인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휴가, 종교행사, 기타 생활관 작업 등으로 인원이 부족해서 대신 끌려 나오는 동기, 고참들도 있기에 나는 기쁜 감정을 억누르고 조용히 참석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군대축구를 경험한다. 최고 짬밥의 고참이 상대팀에 있었다. 우리 편에 고참 중 한 명이 내게 와서 적당히 피해드리고 기분 나쁘신 일 없게 하라고 했다. 수비를 하던 나는 공이 올 때마다 뻥뻥 차내기만 하고 적극적으로 뺏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됐다. 다시 한번 공을 멀리 찼는데 큰 소리가 들렸다.


"인마 보래이?"


약 160명 병력 중에서 최고 짬밥 서열 NO.1 고참의 목소리였다. 공을 자꾸만 멀리 차내는 내가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축구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나는 공을 멀리 차는 대신 가까이 있는 고참들에게 패스를 하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자 얼마 후 또다시 NO.1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점마 누구야!"


"이병! ㅇㅇㅇ"


나는 그대로 멈춰서 차렷자세로 관등성명을 대고 움직일 수 없었다. 축구는 멈추지 않았지만 나는 멈춰 섰다. NO.1 고참은 내게 걸어오더니 말했다.


"야, 니 다음부터 우리 편이야. 알았어? 뛰어!"


약간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지만 화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뛰라는 말에 나는 축구를 계속했다. 쉬는 시간 없이 몇 시간째 계속되는 축구에 힘이 들 법 하지만 생활관을 벗어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했다. 행복했다. 땀을 실컷 흘리면서 뛰어다니니 억눌렀던 마음이 풀렸다.


8월의 어느 주말이다. 어김없이 축구 인원 소집명령이 내려졌다. 다른 날 같으면 날씨가 더워 당직사관이 오후 늦은 시간부터 체육활동을 허락했을 텐데, 오늘따라 1시부터 체육활동이 허락되었다. 마냥 들뜬 마음으로 운동장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잠깐의 쉬는 시간을 제외하고 축구는 몇 시간째 계속되었다. 고참들은 골대 앞에서 공을 기다렸다가 골대로 차 넣었지만, 나머지는 땡볕에서 뛰어다니며 공을 뺏어서 고참들에게 패스를 해야 했다. 그러니 체력이 남아날 리가 없다. NO.1 고참은 축구를 잘 못했지만 골 넣는 순간을 즐겼다. 문제는 골대가 가까워질수록 다리가 풀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설픈 슛이 자꾸만 골대 밖으로 나갔다. 그 무더운 땡볕 아래 모두가 지쳐나갈 즈음에 NO.1 고참이 말했다.


"야야, 딱 한골만 넣고 끝난대이. 인상 쓰면 죽이 뿐 다이"


너무도 해맑게 말하는 그의 한마디에 모두가 정신을 차리고 단 한골만 넣게 해 드리자고 마음을 모았다. 수비수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서있기만 하는데도 NO.1 고참은 골대 앞에서 발이 꼬여 넘어지거나 이상한 곳으로 공을 찼다. 웃을 수도 없고, 주저앉을 수도 없는 시간이 몇 시간째 이어졌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식을 줄 모르는 뜨거움을 뿜어냈고, 모두의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라 열을 뿜어댔다. NO.1 고참도 지친 기색이 역력한데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기회를 놓친 NO.1 고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야야 10분만 더 하고 드가자. 인상 쓰는 놈 보이면 가만 안 둔다이. 알았제."


이미 어지러워서 쓰러질 것 같은데 10분이라니, 아니 10분만 더 버티면 되는 건가?라고 생각했다. 언제 끝날지 몰랐던 축구는 10분 후에 끝이 났고 인상 쓰는 사람 없이 복귀했다. 생활관에서는 축구를 왜 이렇게 오래 하냐며 혼이 났고 죄송하다는 한마디로 조용히 넘어가길 바랐다.


군생활 동안 수없이 많은 축구를 했고, 다른 중대와 시합도 많이 했다. 극적인 골을 넣은 순간도 기억에 남지만 이등병 때 8월의 오후에 5시간 동안 이어졌던 축구가 가장 힘들었고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시 NO.1 병장님은 무척 재미있는 분이었고 우리 중대의 즐거운 분위기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었다. 그래서 따르는 사람도 많았다. 나 역시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자부심을 갖고 군생활을 했다.


비가 오는 날 다른 중대와의 시합에서 NO.1고참은 골키퍼를 하셨는데 우리는 승부차기에서 패배했다. 모두를 모아놓고 본인이 승부차기에서 잘 막지 못해 졌다며 미안하다는 말씀에 어두웠던 분위기는 서로를 위로하며 하나가 되었다. 무섭기만 하던 고참의 어깨가 축 처져있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고 다음에는 꼭 이기자고 다짐하기도 했다. 군대에서 경험한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피가 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 준 NO.1 병장님. 그때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었기에 대화를 해본 기억은 없다. 지금 만나면 편하게 형, 동생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언젠가 만나뵙길 고대한다. 어디에서든지 잘 지내고 계실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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