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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유 Oct 14. 2024

금기어

포기하지 않는 근성으로 끈질기게 구애를 펼친 끝에 식사를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독서실 바로 옆자리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는 예쁜 여학생이 있었다. 얼마나 열심히 하던지 책상에 앉아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유독 그 여학생의 뒷모습에서 남다른 아우라가 느껴질 정도였다. 독서실에서 할 수 있는 구애 작전은 몰래 과자나 비타민 등을 놓아두는 것뿐이었다. 서로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선을 지켜야 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휴학 중인 상태였기에 우편으로 동원훈련소집통지서를 받았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중요한 시간에 2박 3일 동안 훈련받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내 손으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잠시 공부 머리도 식힐 겸 휴식 시간으로 생각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독서실 연장 신청 기간과 동원예비군훈련기간이 겹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든지 방법은 많았음에도, 굳이 옆에 있는 여학생에게 부탁하기로 마음먹었다. 예비군 가기 전 날 저녁에 독서실 연장 신청을 부탁한다는 내용과 함께 핸드폰 연락처를 남긴 쪽지를 여학생 책상 위에 몰래 올려 둔 것이다. 얼마나 심장이 떨리던지 쪽지를 올려놓고 나서 독서실을 부리나케 도망쳐 나왔다.


동원 훈련장에서 훈련을 받고 나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모르는 번호로 문자 메시지가 한 통 와 있었다. 독서실 연장 신청을 했다는 간결하고도 무미건조한 그녀의 메시지였다. 드디어 그녀의 연락처를 알게 된 것이다. 심장이 터질듯한 마음을 꽁꽁 숨기며 평정심을 유지했다. 자칫 좋은 일이 있음을 들키기라도 했다간 훈련장에서 혼자만의 러브스토리를 풀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동원예비군훈련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2박 3일 동안 동원훈련장에서 훈련을 받는데 아는 사람도 있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하지만 금세 친해져서 훈련 시간이 끝난 개인 정비 시간에는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데, 바로 이때 온갖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내 표정을 들키기라도 했다간 눈치 빠른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빨리 털어놓으라며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문자 메시지에 들뜬 기분을 모르쇠 하는 얼굴로 유지했다. 바쁘신데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다는 간결하고도 애정이 넘치는 내용으로 무사히 답장을 보냈다. 물론 가득 담긴 애정은 그녀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밤새도록 연락을 주고받으며 얘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공부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꾹 참아냈다. 예비군 훈련이 끝나고 다시 돌아간 독서실에서 마주친 그녀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나 역시 시험 준비에 몰두했다. 나보다 먼저 시험을 치른 그녀는 어느 틈엔가 독서실 자리를 비웠고, 그녀의 빈 책상을 보고 서운한 마음을 뒤로한 채 자리에 앉았을 때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반듯하고 작은 글씨로 정성스럽게 쓰인, 내 눈에만 보이는 애정이 가득 담긴 공부 열심히 하라는 글, 그리고 초콜릿이 놓여 있던 것이 아니겠는가. 책상을 비우는 순간에 나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럽고 고마웠다.

그리고 얼마 후 밥을 사겠다는 연락이 왔다.


독서실 특성상 실제로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더욱더 긴장이 되었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그녀를 발견하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뒷모습처럼 얼굴도 아주 예쁜 사람이었다. 그녀는 나를 초밥집으로 안내했고 우리의 첫 데이트가 거행되었다. 아직 수험생 신분이던 나는 그녀와의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으로 생각하고 25년 인생의 모든 것을 쏟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식사를 마치고 이동한 카페에서 대화는 약 3시간 동안 이어졌다. 독서실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가족관계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을 전부 설명(?)하고,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씨 따듯한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가끔씩 과자와 음료수를 두고 간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처음에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두고 간 과자와 음료수가 불편하다는 뜻으로 한동안 먹지 않고 책상에 그대로 놔두었는데 또 올려진 과자를 보고 먹지 않으면 계속 쌓일 것만 같아서 그냥 감사히 잘 먹었다고 했다. 고마웠다.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어 어색해질 즈음에 헤어짐이 아쉬워 찬스를 써야만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준비한 이야기보따리가 바닥을 보이고 말았다. 약이 될지, 독이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그것은,,, 남녀 사이에서 절대 해서는 안된다는 바로 그 금기어. 25년 축구 인생, 그리고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를 비장의 카드로 꺼냈다. 특히 축구하다 쓰러질뻔했던 이야기, 중대 체육대회에서 왼발 발리슛으로 골을 넣은 이야기, 축구선수출신 후임에게 축구를 배운 이야기를 온몸으로 표현하며 설명했다. 운동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이 없고, 건전한 취미 활동을 오랫동안 유지하려면 자기 관리가 뛰어나야 한다며 은근슬쩍 자랑도 했다.

축구를 하면서 들었던 모든 이야기들을 과대포장하여 그럴듯하게 늘어놓은 것이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눈에 힘이 풀렸고 먼 산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를 데이트에 후회와 아쉬움을 남길 수는 없었다. 질척거리는 느낌을 준 것 같긴 했지만 축구 이야기 덕분에 1시간가량을 그녀와 더 있을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어느 틈에 해가 지고 다시 배가 고플 시간이 되었다. 이때다 싶어서 저녁 식사 이야기를 꺼내봤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비장의 카드로 꺼낸 축구 이야기가 발목을 잡은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을 깨끗하게 승복하고 인사를 건넨 후 헤어졌다.


당시의 25년 인생에서 축구를 빼놓을 수가 없었다. 금기어인 줄을 알면서도 꺼내어 쓸 정도였으니 축구를 빼면 나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내 모든 것을 보여줬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후회 없이 깔끔하게 뒤돌아 섰다. 그날 저녁, 바라는 일 모두 다 이루고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란다는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달랬다.


며칠 후,

그녀에게서 또 연락이 왔다.


그리고 지금,

첫째 딸에게 먹고 싶은 거 있냐고 물으면 이렇게 말한다.


"초밥!"


아내는 축구를 진심으로 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멋있게 보였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특히 꾸준한 축구 사랑이 성실한 사람인 것 같았다고 했다. 축구는 금기어가 아니었던 것이다. 축구는 평범한 사람을 남편이자 아빠로 만들어 준 은혜와도 같다. 축구를 배우고 연습해서 결혼까지 성공하시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축구는 사랑이다. 이렇게 또 축구가 종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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