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내게 위로 17화

언제부터 에스컬레이터를 탔다고

부끄러움을 알아야

by 낙유

지난여름, 폭우로 침수되어 운행을 멈춘 지하철역의 에스컬레이터가 이제야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침수 후 바로 수리가 되지 않은 것은, 물에 젖어있는 여러 장치들이 일단 말라야 하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얼핏 들었다. 그동안 에스컬레이터 옆에 태산처럼 솟아있는 계단을 보며 깜짝 놀라 한숨을 쉬시던 어르신들도 많았다. 한걸음 옮기기가 힘이 들어 좁은 계단에서 여러 번 멈춰 서기를 반복하며 뒤에서 기다리는 젊은이들에게 미안해하시는 모습도 많이 보았다. 그러다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과 올라가려는 사람들이 서로 엉켜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몇 개월 동안 같은 상황이 눈앞에서 일어났으므로 한동안 멈춰있던 에스컬레이터가 다시 가동되는 걸 보니 반가운 마음이다. 잊고 있었던 물건을 갑자기 찾은 것처럼 은은한 기쁨이 밀려와 나를 살며시 설레게 했고, 그것이 마나 일상생활에 깊이 들어와 있는 대상인지 새삼 고맙다. 동시에 그동안 계단으로 다니느라 힘들었던 기억과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타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나를 인지했다. 그 순간, 나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랐고 세상이 멈춘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에서 천둥번개가 내리 쳤다. 에스컬레이터가 침수되어 운행을 멈추기 전부터 나는 항상 계단으로 다니지 않았던가.


에스컬레이터가 침수되기 전에도, 침수된 후에도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지 않았다. 그런데 에스컬레이터 수리가 끝나자마자 에스컬레이터를 타려고 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지난 몇 개월 동안 움직이지 않는 에스컬레이터를 보고 출퇴근하면서 언제 수리가 끝나려나 궁금했던 기억이 어느새 타고 싶다는 의지로 바뀌기라도 한 것일까. 조금이라도 더 걷고자 계단을 이용하기로 한 것인데, 마치 처음부터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했던 것처럼 계단을 불편하게 여기고 편함을 찾고 있었다. 내 마음, 참으로 간사하다. 변덕스러운 마음을 인지하니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입 밖으로 내뱉지 않고 생각에 그친 것이 다행이다. 내 생각을 말로 하기 전까지는 나만 알고 있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 정도다. 마치 처음부터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했던 터라 고장이 나서 불편하다 생각하는 태도가 파렴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찰나에 내 마음은 어둠의 늪으로 빠진다. 검은색으로 변한 공기가 시야를 가리고 나를 짓누르기 시작한다. 너무 무거운 나머지 주저앉을 것만 같다. 잠시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더니 다시 주변이 밝아온다. 어둠을 아는 사람만이 빛을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나를 살리는 빛, 생명의 빛이란 이런 것인가. 앞이 보인다. 내 다리는 다행히 계단을 잘 내려가고 있다. 마음의 늪에 조금만 더 빠졌더라면 정말로 계단에 주저앉았을지 모른다. 이런 감정이 염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스스로에게 간사한 마음을 들키니 부끄러웠고 숨고 싶었다. 안한 줄 모르는 마음, 부끄러움을 모르는 마음은 우리의 큰 적이다. 스스로를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거대한 장애물이다. 장애물을 인지하고 저 멀리 내다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장애물이 원래 그 자리인 것처럼 무감각해서는 안된다.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에 여전히 매달려 있는 것이 미안해 자리를 비워주는 나뭇잎도 염치를 알아서인지 모른다. 염치없는 이의 삶은 어떤가. 체면과 부끄러움을 살피지 않는다면 모두가 기피하고 경계하는 대상이 된다. 진정으로 그를 존중하며 아껴주는 사람이 없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지속 가능한 관계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대방은 인위적인 관계 속에서 예측이 잘 되지 않아 불안과 불편을 안을 수밖에 없다. 스스로 뭔가 문제가 있음을 느낀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살피지 않으니 스스로 성찰하는 힘이 약해 내면의 성취를 이루지 못한다. 자기 자신만이 옳다고 믿으므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모든 문제를 외부에서 찾는다. 순환이 계속되어 롭고 힘든 삶을 살게 된다.


사람 마음은 약하다. 그 마음은 하루에도 여러 번 상황에 따라 변한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 변함없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과 에너지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렇게 마음을 단련해야 일상생활에, 나아가 삶에 있어 흔들리지 않는 기둥을 마음속에 세길 수 있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중요한 열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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