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출장을 앞두고 마침 울산에 살고 계신 이모가 보고 싶어 연락을 드렸다. 그리고 약 7년 만에 만나는 이모와 점심약속을 잡았다. 그러나 업무가 늦어진 관계로 점심시간이 지나고서야 겨우 만났다. 이모 목소리는 여전히 쩌렁쩌렁하신데 얼굴의 주름은 전보다 더 깊었다. 아들 딸 다 결혼하고 손자 손녀가 셋이나 되니 그럴 만도 한데, 뜨문뜨문 봤던 이모인지라 이모가 젊었을 때 모습만 생각했기에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실감한다.
사람은 거울이나 타인의 눈을 통하지 않으면 직접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다. 거울을 잘 보지 않는 한 스스로에게서는 세월의 지남을 실감하기 어렵다. 내 주변의 변화나 오랜만에 만난 상대방의 모습을 보고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느낄 뿐이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아이가 벌써 유치원에 가더니, 며칠 전 이번 어린이날에 자전거 사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한다. 소위 뒤통수가 얼얼하다. 간혹 어른스러운 말을 할 때면 어디서 들은 말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분위기나 말투로 아이의 마음을 가늠할 수 있었기에, 마음이 이렇게 넓어질 만큼 많이 컸음을 실감했다.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한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퇴직을 하고 환갑이겠지. 그러다 또 갑자기 고희에 이르러 지난날을 돌아보다 팔순이 되어 죽음을 준비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인간의 수명은 너무도 짧기만 한 것이 아닐까. 100세 시대라곤 하지만 늙고 힘이 없어 겨우 생을 연명하고 있다면 스스로가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물론 존재하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와 메시지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르나, 스스로가 삶의 의미를 갖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세상은 상대적이다. 인간보다 수명이 짧은 생물보다는 긴 시간이 주어지고, 인간보다 더 오래 사는 생물보다는 짧은 시간이 주어진다. 이 진리를 바꿀 수 없다면 받아들이고 한 가지 질문에 접근해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시간의 속도를 조절할 수 없기에, 산다는 것은 결국 해가 뜨고 지는 동안 그에 편승하여 내가 나를 맡기는 거다. 더 풀어본다면 '어떤 마음으로 흘러가는 시간에 나를 맡길 텐가.' 진리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은 우리 각자의 마음가짐에 진리라는 가장 큰 범주를 새김으로 출발한다. 좌우명이라고 불러도 좋다. 추상적이어도 좋다. 마음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느낌만 들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인지하고 의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언제든 죽어도 삶에 미련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 아빠라는 존재가 된 이후로는 많이 바뀌었다. 이제는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알려주고 싶은 것도 많고, 결혼할 때 손도 잡아줘야 한다. 그리고 손자 손녀까지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니 먹는 것부터 신경 쓰게 되고 운동도 더 열심히 한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독한 감기에 걸려 운동은커녕 겨우 움직이기만 하고 있다. 건강하게 오래 살겠다는 마음은 지나친 욕심이라 알려주는 것만 같아서 다시 겸손한 마음을 먹는다. 그저 내 수명이 다 할 때까지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게 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