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모든 것을 태우기라도 할 것처럼, 사람이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거리를 텅텅 비우게 한 날씨가 살짝 풀이 죽은듯한 여름날. 살랑살랑 더운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가을 소식은 아직인가 보다. 그 뜨거움을 피해 무럭무럭 자라고 있음에도 무지한 탓에 이름을 몰라 불러주지 못하는 풀과 나무들을 본다. 언젠가 이 거리를 초록빛과 그늘로 가득 채울 거목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늘로, 그늘로, 조금만 더 그늘로 피해 있으면 지난한 뜨거움은 지나가리라 믿고 있다. 집 안에 숨어 숨죽이면서 혹여나 누가 분에 못 이겨 땡볕으로 뛰쳐나오진 않을까 조마조마 한 마음으로 밖을 향한 눈을 떼지 못한다. 점심에 잠깐 내린 소나기는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빗물을 빨아들인 대기에 아직 촉촉함이 남아 있어서인지 온 하늘이 맑고 푸르게만 느껴진다. 해는 아직도 머리 위에서 넘어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처마 끝 그늘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을 무렵. 미처 뜨거운 지붕 위에서 처마 밑 그늘로 탈출하지 못한 물방울이 기를 쓰고 떨어져 내 정수리를 차갑게 때린다.
예상하지 못한 물방울 하나가 무기력한 심신에 정신이 번쩍 들도록 한다. 탈출한 곳이 하필이면 그늘이 아닌 내 정수리라 미안하지만, 내 머리 위에 앉았으니 스승으로 받들어 모셔야 할 존재로 삼고 위로를 대신한다. 고요함 속에서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우주 속의 먼지 같은 내가 거대한 우주가 된 것만 같은 느낌으로 나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나와 마주한다. 상처받은 곳은 없는지, 치유할 곳은 어디인지 지금의 내 상태를 알아간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대하고 있는가에 대해 묻고 답한다. 꼬리를 물어가며 묻고 답하기를 반복하면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대답을 해온다. 그것이 나를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게 단단히 잡아주는 마음의 기둥이 된다.
내 마음을 괴롭게 하는 고난, 고초, 시련들이 많다. 한데 진정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고난, 고초, 시련인가 아니면 고난, 고초, 시련이라고 받아들이는 나인가. 내 마음속에 담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닌데 구태여 욕심을 부려 무엇인지도 모르고 담아 댄다. 나를 잃어버린 나머지, 내 것인지 아닌지 구분도 못했다. 본능에 휩쓸려 인생의 노선을 잃어버리면 괴로움이 찾아온다. 이를 알아채고 치유하지 못하면 인격이 어디까지 곤두박질 칠지 알 수가 없다. 깨달음을 주는 것은 내 원수라도 스승으로 생각하고 사랑하라고 했다. 작은 물 한 방울조차 내 스승인데 그 무엇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담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니고, 담지 않으려면 세상을 대하는 나를 알아채야 한다.
오늘 또 다른 스승을 미처 깨닫지 못한 건 아니었을까, 내일은 또 어떤 귀한 인연으로 나를 찾아올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마음에 흔들리지 않는 큰 기둥 하나를 세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