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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유 Nov 24. 2023

우리 학교에 축구부가 있다고?

멋진 형들을 바라보면서 상상 속의 나와 사랑에 빠진 나. 텔레비전에서만 축구선수를 만나던 나는 뒤통수가 얼얼했다. 붉은색 유니폼을 입고 전 국민의 함성과 염원을 담은 응원을 받으며 축구를 하는 국가대표 선수들. 눈앞에 바로 그 국가대표 선수들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는 이미 붉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 국가대표 선수가 되어 있었다. 물론, 상상 속에서. 하지만 너무 어렸기에 축구부가 뭔지도 몰랐다. 내일은 어떤 책을 읽고 독서카드를 써야 하는지에 고민하는 스트레스가 심한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일 뿐이었다.


정규 수업이 끝난 후,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것까지 마쳐야 학교 일정이 끝났다. 3학년이 되니 학교 수업이 끝나는 시간도 점점 늦어지고 운동장에서 노는 시간도 늦어졌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부터 축구부 형들의 운동 시간과 나와 친구들의 운동 시간이 겹치기 시작했다. 하나의 운동장에 두 개의 축구 골대가 있다. 그런데 축구를 하려는 사람은 축구부 형들과 초등학교 3학년 몇 명의 아이들이다. 덩치도 크고 새까맣게 탄 얼굴에 목소리도 큰 축구부 형들을 피해 골대 뒤에서 놀았다. 골키퍼는 돌아가면서 하고 나머지는 슛과 패스를 하며 골을 넣을 때마다 여기저기 뛰면서 세리머니를 했다. 때로는 서로 멋진 세리머니를 하기 위해 버를 하며 큰 웃음을 주었다.


하루는 운동장 구석에서 축구공 뺏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상대적으로 새하얀 얼굴에 축구 유니폼을 입은 멋진 형이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왜 오는 거지?'. '우리에게 축구를 알려주려고?', '축구를 같이 하자고 하려나?', '골대 앞에서 축구를 해도 된다고 하려나?'라며 온갖 행복한 상상을 했다. 내심 뭐라고 대답을 해야 멋있을까 엄청 고민을 했다. 금세 바로 코앞까지 와 있는 유니폼을 입은 멋진 형에게 우리는 바람 빠진 축구공을 내보이며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그리고 '네, 좋아요!'라고 대답할 준비를 했다.

나의 우상과도 같았던 유니폼의 멋진 형은 이렇게 말했다.


"야, 너네 안나가? 죽을래?"


평온하게 걸어오던 모습의 멋진 형은 코 앞에서 인상을 잔뜩 쓰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표정으로 우리에게 나가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의 바람 빠진 고무공 같은 축구공을 저 멀리 차버리려고 했다. 산산조각 나버린 행복한 상상은 우리를 더 허탈하게 했다. 따귀라도 한 대 맞을까 봐 무서웠다. 오히려 바람 빠진 축구공을 학교 담장 밖으로 차지 않은 것이 고마웠다. 독서카드를 작성하고 선생님께 검사를 받기 위해서 읽었던 많은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없었다. 온통 모두가 행복하고 서로 배려하는 좋은 이야기들만 가득했는데 현실은 아니었다. 형들이 있는 운동장에 우리 자리는 없었다. 나는 그때 온몸으로 많은 걸 느꼈다. 세상은 내 마음과 다름을, 세상은 동화 같지 않음을 말이다.


그때부터 유니폼 입은 형들이 무서웠다. 운동장에서 놀다가도 유니폼 입은 형들이 오면 공을 끌어안고 친구들과 계단에 앉았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형들의 훈련을 구경했다. 그렇게 4학년이 되었고, 독서카드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4학년에는 어려운 단어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 써오는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 쥐가 날 것 같았다. 그리고 운동장에서 훈련 훔쳐보기 다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처음에는 운동장에 유니폼을 입고 오는 형들이 단지 축구하러 오는 멋진 형들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 학교 조회 시간 점심시간에 유니폼 입고 있었던 형들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제야 우리 학교에 축구부가 있음을 알았다. 어려운 단어 정리하기의 고통을 버텨내고 5학년이 되었다. 이때는 축구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정말 많아졌다. 단체로 늦은 시간까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훈련을 구경다. 다른 반 어떤 친구는 축구부에 들어가게 되어서 축구를 배운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느 날, 우리 반 친구들은 어김없이 학교 수업이 끝난 후에 운동장에서 놀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학년의 유니폼을 입은 축구부 친구가 우리 쪽으로 오더니 다음 주에 축구부와 축구시합하는 게 어떠냐고 했다. 우리는 친구들과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알겠다고 했다. 축구부 훈련의 성과를 실전에서 확인해 보려는 축구부 코치선생님의 지시였다. 그래서 같은 학년인 축구부 친구가 우리에게 시합을 제안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시합을 승낙했지만, 멋들어진 유니폼에 비하면 변변치 않은 옷차림 축구화가 있는 친구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축구부를 이기겠어~?'라고 생각했다. 단지 학교를 마치고 우리끼리 노는 것이 아닌 큰 운동장에서 11대 11로 정식 시합을 한다는 사실 자체에 신이 났다. 나는 그 길로 집에 달려가 엄마에게 자랑하듯 이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학교를 마치자마자 운동장에서 노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집으로 달렸다. 아침부터 오직 집에 갈 생각밖에 없었다. 엄마가 축구화를 사주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내 초등학교 5학년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비싸고 멋진 축구화를 품었다. 아디다스, 멋진 가죽, 스터드가 12개 달린 축구화, 가격 31,500원,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나는 저녁에  축구화를 끌어안고 사랑스러운 본드 냄새를 맡으며 잠이 들었다. 그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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