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1~2학년 까지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정확히는 기억이 별로 없다. 1학년 초반에 짝꿍이 전학을 가는 바람에 1학기 동안 혼자 앉았던 일(1학기 짝꿍 사건). 2학년 수학 시간에 몇몇 아이들이 선행학습으로 나눗셈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 큰 충격으로 느꼈던 사건(2학년 나눗셈 사건). 한 번은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집에 가는 길에 있었던 일이다.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세고 지팡이를 짚으신 할머니가 우리를 집 안으로 불렀다. 아들에게 전화하려는데 도와달라고 하셨다. 나는 작은 마당을 지나 신발을 벗지 않고 마루에 걸터앉았다. 할머니는 방에서 전화선을 길게 늘어뜨린 전화기를 가져오셨다. 작은 수첩을 보여주시길래 수첩에 적혀있는 지역번호까지 전부 누르면 신호가 갈 것이라고 알려드렸다. 그리고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나만 할머니와 대화를 하고 있음을 알았다. 같이 들어온 친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혹시라도 방에서 누가 뛰쳐나와 나를 유괴하지는 않을까 무서웠다. 심장이 덜컹거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얼른 도망쳐 나왔다. 다행히 친구들은 나를 버리지 않고 대문 밖에서 작은 돌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줘야 하는 게 아닌가? 내게 무슨 일이 생겼으면 친구들은 적당히 기다리다 먼저 갔을까? 당시에는 뉴스에 아이들 유괴사건이 종종 나오며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터라 굉장히 무서웠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2학년 전화번호 사건).
이 정도 사건을 제외하고는 축구, 야구, 달리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 등을 했던 것 외에 별다른 기억이 없다.
*법학을 공부하다 보면 기억하기 쉽도록 주요 판결에 사건의 이름을 붙이는 걸 볼 수 있는데, 나도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사건에 이름을 붙여 보았다.
초등학교 3~4학년에도 공부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그때는 담임선생님이 독서노트를 주시며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게 하셨다. 독서노트 검사를 철저히 하셔서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동네에서는 친구들과 매일 축구, 야구, 땅따먹기 같은 놀이를 했다. 집에 있을 때는 축구와 야구 등 스포츠를 텔레비전으로 숨죽이며 즐겨 보았다. 친구들과 축구나 야구를 하면 대부분 우리 팀이 이겼는데 한번 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분을 삭이기가 힘들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점수를 잘 못 세어서 우리 팀이 항상 이겼던 것으로 착각한 것 같기도 하다). 스포츠에서 느껴지는 열기와 감동이 좋았다.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호흡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어 보였다.
특히 그 시기에는 친구들과 알루미늄 방망이와 테니스 공으로 야구를 많이 했다. 다음날 아침 8시까지 학교에 등교해서 야구를 하자고 약속하는 날이 많았다. 가방을 메고 교실이 아닌 운동장에 있는 야구장으로 모였다. 아침 일찍 시작한 야구시합에서 우리 팀이 지기라도 하면 오전 내내 잔뜩 인상을 쓰고 무엇이 문제였나 고민했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장난기도 있고, 잘 웃던 아이가 체육활동만 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다. 우리 팀이 지는 게 너무 싫었다.
텔레비전에 중계로 배운 야구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누가 무엇을 잘하는지, 각 포지션에 누가 어울리는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자칭 감독 아닌 감독이 되어 친구들에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를 조언을 했다. 뭔지 몰라도 멋진 플레이를 하는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수시로 변하는 상황에서 눈빛만 보면 통한다는 말의 의미를 몸소 느꼈다. 단점이 보이는 친구들에게는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 저렇게 하는 게 좋겠다.' 등의 조언을 했다. 야구를 텔레비전으로만 배워서 제대로 아는 게 없었을 텐데 무슨 자신감으로 조언을 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다만 자칫 소외감을 느끼는 친구가 있을까 봐 걱정이 됐다. 모두가 흥미를 잃지 않고 계속 참여하면서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할 수 있다는 마음을 나누고 싶었다. 친구들과 같이 운동하면서 이 즐거움을 계속 나누고 싶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가 파한 후, 어김없이 학교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데 멋있는 형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순간적으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니, 정말 시간이 멈췄다. 사람이 저렇게 느리게 걷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분명 시간이 멈춘 거다. 그리고 걷는 듯 마는듯한 그 순간들 속에서 나는 보았다. 형들은 하얗고 반짝이는 유니폼을 입고 운동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있었다. 신발을 구겨 신고 바닥을 끌고 있었다. 이마에는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고, 수돗가에서 머리를 감았는지 마치 헤어 젤을 바른 것 같은 스포츠머리였다. 약간 삐딱하게 걷는 모습도 뭔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발목에서부터 몇 번 접혀서 종아리는 덮었지만 무릎까지는 올리오지 않은 완벽한 비율로 자리한 하얀색 긴 양말. 그 양말에 묻어있는 절대로 털어내서는 안 될 완벽한 조화를 이룬 흙먼지들. 걸을 때마다 슬쩍슬쩍 들리는 뒤꿈치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걷는 모습까지 모두 눈에 담아냈다. 게다가 서로 대화하며 웃는 모습은 남자가 봐도 반할 만큼 아름다웠다. 햇빛에 반사된 유니폼이 어찌나 빛이 나던지 만화의 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난 생각했다. 저기에서 머리를 한 번만 쓸어 넘겨준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장면일 것이라고.
나는 그 길로 사랑에 빠졌다. 나는 이미 유니폼을 입고, 흙이 묻은 스타킹을 신고, 신발을 끌면서, 운동 가방을 메고, 살짝 젖은 스포츠머리에 세상에서 가장 멋진 미소를 짓고 있다. 형들의 걸음걸이 그대로 따라 걸으며,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나는 사랑에 빠졌다.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사랑에 빠졌다. 상상 속의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