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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그다드Cafe Sep 07. 2024

직장인, 중국 냉면을 먹는 이유

어제 빼기 오늘은 '중국 냉면'

직장인인 내가, 직장에서 가장 즐거워하는 고민은 무엇일까? 아마도 점심 메뉴를 고르기 위한 고민이 아닐까 싶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사내식당이 없기 때문에 근처의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해야 한다. 상황에 따라 구내식당이 없는 점은 종종 아쉬울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대체적으로 점심 메뉴를 골라야 하는 고민은 즐겁다. 그리고 그 시절, 그 계절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기 때문에 고민은 더 즐겁다.


이반지하 작가님은 <이반지하의 공간 침투>에서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슬슬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동안 마음이 너무 바빴다. 24시간 돌아가는 과열된 서버 같았다. 그렇게 나의 순간들을 다뤄낼 시간은 미뤄지고 미뤄지고, 그러면 나는 그 순간을 잡아챈 글을 다시 그때만큼 써낼 수 없다는 걸 안다. 놓친 글들은 모두 상실이 된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상실을 줄이기 위해 다시 키보드와 친해지기로 한다.



그렇다. 그 시절에만 쓸 수 있는 글이 있듯, 별다를 게 없는 직장인의 점심 같지만 그 시절, 그 계절에만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있다. 나에게는 '중국 냉면'이 딱 그렇다. 중국 냉면은 오직 여름에만 먹을 수 있는 계절 한정 메뉴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 있는 어느 중국집에서는 분명 동지에도 중국 냉면을 판매하는 집도 있겠지만, 내 주위의 중국집에서는 오직 여름 한철만 중국 냉면을 판매한다.


중국집마다 조금씩 다르게 '중화 냉면', '중국 냉면', '중국식 냉면'으로 같은 듯 다른 이름으로 메뉴에 걸려 있지만 대부분 닭고기 육수와 치킨스톡을 베이스로 각종 야채와 해산물을 고명으로 올리고, 땅콩 소스를 넣어서 먹는 차가운 면요리를 칭한다. 재밌는 점은 정작 중국 본토에서는 비슷한 레시피의 메뉴를 볼 수 없고 한국에서는 맛 볼 수 있다고 한다. 한국식 짜장면이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회사 근처 중국집의 메뉴판

내가 중국 냉면을 특별히 더 사랑하게 된 계기가 있다. 바로, 성해나 작가님의 <두고 온 여름>을 읽었기 때문이다. 요즘 대세로 떠오른 젊은 작가 성해나 님의 작품을 우연히 접했다. 그리고 우연히 중국 냉면을 사랑하게 되었다. <두고 온 여름>에서 중국 냉면을 묘사하는 부분만 발췌했다. 음식 표현 감각이 똥인 내가 따로 중국 냉면을 묘사하지 않아도, 소설에서 아련하고 먹고싶게 그리고 찰떡같이 표현했기 때문에 슬쩍 숟가락 얹어본다.  (책 추천은 하지 않으렵니다. 하지만 궁금하지 않으세요? :))



기하

중국 냉면도 그중 하나였다. 그 여름 재하는 꼭 땅콩 소스가 듬뿍 들어간 중국 냉면을 먹었다. 그 애는 국물이 탁해질 때까지 소스를 듬뿍 풀어 먹는 걸 좋아했다.

나는 그 반대였고.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냉면을 앞에 두고 재하는 말했다.


재하

그날 새아버지는 우리에게 중국 냉면과 난자완스를 대접했습니다. 중국 음식이라면 자장면이나 짬뽕, 탕수육 정도만 겨우 맛보았는데, 그런 요리는 처음이었습니다. 닭고기로 낸 육수와 면 위에 올려진 각양각색의 고명들, 땅콩 소스. 선뜻 젓가락을 들지 못하는 저에게 그는 어색하게 말을 붙였습니다.

괜찮다. 맛을 들이면 곧 익숙해질 거야.

첫 입에 혀에 감돌던 독특하지만 시원한 식감. 땅콩 소스의 묵직하고도 복잡다단한 맛. 이전에 먹어보았던 냉면과 비슷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생소해 처음에는 꺼려졌지만, 한 그릇을 천천히 비우는 동안 그의 말대로 그 맛에 차차 익숙해졌습니다.

새아버지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생경하고 낯설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내가 모르던, 그간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디게 해 주었습니다.


재하

재하야, 니는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나?

돌아가고 싶은 순간. 그 물음에 왜 중국 냉면이 생각났던 것일까요. 입안에 감돌던 독특하지만 시원한 식감. 땅콩 소스의 묵직하고도 복잡다단한 맛. 새아버지와 처음 만난 중식당의 생경하면서도 포근한 공기. 자기 몫의 땅콩 소스를 덜어 나의 그릇에 듬뿍 얹어주던 기하 형.


(위) 땅콩소스를 풀기 전, (아래) 땅콩소스를 푼 후

며칠 전에도 점심으로 회사 근처 중국집에서 중국 냉면을 먹었다. 올여름은 유난히 무더웠고, 힘든 일로 속앓이를 많이 했는데, 중국 냉면과 함께 올여름을 잘 견뎠다. 사장님께 물어보니, 다음 주까지만 중국 냉면을 판매한다고 한다. 점심 메뉴로 중국 냉면을 사랑하는 직장인 입장에서는 참 아쉽다. 


tvn <어쩌다 어른>에 출연한 김대식 교수님께서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매일 똑같이 살면 뇌가 기억을 삭제합니다. 사실 우리 인생은 매일 그다지 차이가 없거든요. 어제 빼기 오늘은 거의 '0'입니다. 오늘 빼기 내일도 '0'이죠. 그러다 보니까 매너지즘에 빠지게 되는 거죠. 몇 달 뒤에 오늘은 거의 기억하지 못합니다. 매일 똑같이 살면 365일을 뇌가 압축해 버립니다. 변화가 없는 인생을 사시면 인생이 사라져 버립니다. 매일 반복된 인생을 살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 기억하세요."


어쩌면 아무 의미도 없고 그저 그런 재미없는 직장인의 점심에 '중국 냉면 한 그릇'이 의미를 부여한 건지도 모르겠다. 중국 냉면을 점심으로 먹은 날은, 어제 빼기 오늘은 최소한 '중국 냉면 한 그릇'으로 남기 때문이다. 계절의 치환에 따른 중국 냉면의 판매 중단 소식은 매우 아쉽지만, 나는 또 부지런히 중국 냉면을 대체하는 계절 한정 메뉴를 찾으련다. 어제 빼기 오늘이 0이라면 너무 억울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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