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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그다드Cafe Nov 07. 2024

히로뽕, 전쟁을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

히로뽕과 전쟁 그리고 아이러니

나는 전쟁을 반대한다. 전쟁을 반대하는 이유는 전쟁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전쟁을 잘 알기 때문에 전쟁을 극렬히 반대한다.


내가 전쟁을 잘 아는 이유는 두 번의 전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경험은 직접 전쟁에 참전한 2006년 아프가니스탄 파병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역사는 수십 년이 되었고, 현재도 전쟁 후유증 으로 일반 국민들은 지옥을 경험하고 있다. 나는 아프가니스탄의 전쟁 역사와 그 원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파병 기간 중에 만났던 한 아프간 소년은 안다.


내가 미군과 함께 어떤 작전 수행을 위해 아프간의 일반 민가를 찾았을 때, 한 소년이 나에게 다가왔다. 가끔씩 아이들이 자살 폭탄 테러에 무자비하게 이용되었기 때문에, 접촉을 피하라는 교육을 미리 받았음에도 그때의 나는 그 소년의 다가옴을 막을 수 없었다.


그 소년은 내 손을 자신의 다리로 가져갔다. 그리고 만져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나의 손은 그 아이의 다리를 살짝 스쳤는데, 아이의 연약하고 따뜻한 피부가 아닌, 이질적인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소름이 돋았다. 놀란 내 모습이 아이는 웃기는지, 다리를 감싸고 있던 바지를 올려 보였다. 거기에는 플라스틱 의족이 있었다. 지뢰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아이는 지금의 나의 아들보다 조금 더 큰 정도였다.

나의 아들이 뛰어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 가끔씩 아프가니스탄에서 만났던 소년이 생각난다.


두 번째 경험은 전쟁 이후 폐허가 된 나라에서의 경험이다. 미국을 포함한 다국적 연합군은 2003년 이라크를 독재자로부터 구하고 민주주의와 평화를 심기 위해 침공했다. 그리고 이라크의 독재자 대통령을 축출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라크의 민주주의와 평화는 요원하다. 개인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아이러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전쟁 후 복구 사업이 한참이던 2011년부터 3년간 한국 회사에 근무하며 이라크 바그다드에 머물렀다. 머무르면서 전쟁 후 폐허가 된 나라와 도시와 사람들을 직접 경험했다. 이라크의 한 여름 온도는 50도가 훨씬 넘어갔지만 일반 국민에게 전기는 하루에 5시간도 공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회사 덕택에 비싼 디젤 발전기를 돌릴 수 있었기에 50도가 넘는 상황에서 전기가 끊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정에 대해서는 솔직히 공감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같이 일하던 한 이라크 직원의 어린 조카가 아팠는데, 잦은 단전으로 아이가 너무 힘들어해 우리가 근무하는 사무실로 데려와 며칠 머무르게 하며 같이 간호했다. 다행히 그 아이는 우리 사무실에서 머무르며 나을 수 있었다. 그 아이의 열나는 머리를 걱정스레 짚었던 장면이 가끔씩 떠오른다. 지금의 나의 아들이 아플 때, 이라크의 그 아이가 생각난다. 아이의 열이 손을 타고 내 몸으로 전달되던 그때의 열감熱感은 여전히 생생하다.


또 한 가지 전쟁을 반대하는 이유가 늘었다. 전쟁은 괴물을 낳기 때문이다. 100년 전 세계 대전을 통해 낳은 괴물이 '히로뽕'이다.


IT 산업의 발달과 텔레그램을 통한 비대면 거래 증대로 인해 마약 접근성이 매우 낮아졌고, 우리나라는 이제 마약 청정국이 아님을 누구나 알고 있다. 마약에 대한 중독과 그 폐해에 대해서는 실로 엄청나다. 나는 아직(?) 마약과 중독자를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고 주로 영화와 책을 통해 간접으로 접했다. 다음의 내용도 책에서 간접으로 접한 마약에 대한 잔상이다.



타잔, 뽕쟁이가 해줬던 이야기가 있어. 그놈 여친이 징역 살고 나와서 둘이 징역 이야기를 꽃피웠는데 아, 물론 둘이서 술 한잔한 상태였대. 그냥 '술' 말고 '얼음 술'. 그 여친이 자기와 같은 방에서 지내던, 마약 했던 언니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했다더라. 그 언니가 멍한 얼굴로 말했대. 눈 떠보니 20년이 지나 있었다고. 그 말을 하면서 '어쩜 아직도 내가 깨지 않은 걸까.' 그랬대. 그 이야기 듣고 소름이 돋았지.

구치소에 같이 있던 다른 뽕쟁이들에게서도 이야기 많이 들었는데, 한 뽕쟁이는 주사를 놓을 때 혈관을 잘 찾지 못하는 간호사들이 이해가 안 된다더라. 자기는 눈 감고도 온몸의 혈관을 찾을 수 있다면서.

...

또 이름이 기억 안 나는데 영감님이었거든. 그 영감님이 말하더라. 뽕 하면 끝이라고. 뽕 끊으려고 대마, LSD, G, 코카인, 약이라는 약은 다 해봤는데 뽕이 최고래. 뭘 하더라도, 참고 참아도 마지막은 뽕이래. 결국 끝까지 뽕을 하게 된다는 거지. 괜히 뽕쟁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라더라.

주변 사람들 다 떠나고 인생에서 가장 가깝던 가족, 가족이 없어진다더라. 나한테 나가서 절대로 마약 묵지 말라고 했어. 한 번만 하는 건 없다고. 뒈진 다음에 다시 살아날 수 없듯이 한 번은 없대. 내가 영감님한테 물어봤어. 이번에 나가면 참을 생각 없냐고. 영감님이 말했어. 죽기 싫어서 교도소에 들어온 거라고. 몸 챙기러 들어왔다는 거지. 인생을 마약에 빼앗기고 모든 걸 포기해버렸대. 끊겠다는 생각 자체도 포기했다더라. 어때, 무섭지? 이래도 하고 싶어?

어쩌면 선택과 후회는 같은 단어일지 몰라. 내게 후회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거고 선택은 무언가를 가지는 건데 같은 의미처럼 느껴져. 난 죄를 반성할 시간을 갖게 됐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거야.  


임제훈 작가의 <1그램의 무게> 중에서.


이 글은 마약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히로뽕과 전쟁의 연관성에 관한 것이다. 히로뽕은 우리나라 마약류 사범 중 차지하는 비율이 1995년 이후 급속히 증가해 이내 전체 마약류 사범(마약/향정/대마)의 50%를 웃돌기 시작했고, 2001년에는 78.8%를 차지했다*.


*통계 자료는 전현진 작가의 <뽕의 계보>에서 참고


수리남의 어떤 목사님은 '히로뽕은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사탄의 가래 같은 것이고, 코카인은 자연적으로 태어난 주님의 은총'이라고 하면서 히로뽕을 폄훼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리적인 영향과 역사적인 배경으로 '히로뽕'이 원탑이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점은 이 히로뽕의 탄생과 확장에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인 '2차 세계 대전'이 있고, 전범국인 일본과 독일이 주도했다는 점이다.  


다음은 <뽕의 계보>와 양성관 작가의 <마약 하는 마음, 마약 파는 사회>에서 참고, 발췌, 요약한 내용이다. 일본의 내용은 주로 <뽕의 계보>를 참고했고, 독일의 내용은 <마약 하는 마음, 마약 파는 사회>를 참고했다.


먼저, 히로뽕과 관련된 일본의 역사를 살펴보자.  


-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1년, 일본의 다이닛폰제약은 상품 필로폰Philopon(일본어 발음 '히로뽕 ヒロポン')을 개발한다. ‘노동을 사랑한다’는 뜻의 그리스어 필로포노스Philoponus에서 따온 이름이다. 메스암페타민으로 만든 일본의 첫 각성제였다.


- 히로뽕은 메스암페타민 성분 각성제의 대명사가 된다. (한국에서 메스암페타민 성분의 마약류를 필로폰이나 히로뽕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히로뽕으로 표기되다 각성제로 통용되고 있다)


- 메스암페타민은 19세기 후반 ‘일본 약학의 아버지’인 ‘나가이 나가요시’에 의해 발명(?) 되었다. 나가이 나가요시는 일본의 메이지 신정부의 첫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871년 독일(당시 프로이센왕국)의 베를린 대학에서 당대의 대가들에게 유기화학을 배웠다. (이때부터 독일과 일본은 친했다)


- 최첨단 지식을 익힌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그는 13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1884년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에겐 막 출범한 제약회사 다이닛폰제약(최초의 히로뽕을 만든 그 회사)의 제약장, 도쿄제국대학 교수, 중앙위생회위원 등의 임무가 맡겨졌다. 막 태동한 일본 약학의 기틀을 잡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나가이가 독일에서 익힌 기술과 공수한 실험 도구를 바탕으로 일본의 제약과 합성물질에 대한 기술은 발전해 갔다. 노력의 결실로 1894년에 약학 전문지에 메스암페타민의 합성법을 발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 ‘두뇌의 명석화, 체력 항진, 권태 제거, 졸음 일소.’ 당시 신문에는 히로뽕 광고가 실렸고, 약국에서 판매가 개시됐다. 막 세상에 선보인 히로뽕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때마침 벌어진 전쟁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유럽을 휩쓸었고,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시작으로 태평양전쟁이 벌어졌다. 히로뽕은 밤낮으로 싸우고 일해야 돌아가는 전시체제의 연료였고, 필수 군수품이었다. 특히 자살 특공대인 가미카제 대원들에게 공포를 느끼지 않고 목숨을 버리도록 메스암페타민을 투여했다고 한다.


이제 ‘일본 약학의 아버지’에게 큰 가르침을 준 독일을 살펴보자.


- 독일의 화학자인 프리츠 하우실트Fritz Hauschild 박사는 일본 과학자들의 연구를 참조해 1937년 자체적으로 메스암페타민을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의 히로뽕인 '페르비틴Pervitin'은 피로회복제이자 강장제로 판매되었다.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메스암페타민 성분의 페르비틴을 대량 생산해 전쟁터의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에게 대량 공급했다. 페르비틴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학생은 시험을 더 잘 치기 위해서, 외과 의사는 수술에 더 집중하기 위해서, 야간근무를 하는 전화국 교환원과 간호사는 졸지 않기 위해서 이 약을 복용했다. 심지어 당시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초콜릿 브랜드인 힐데브란트Hildebrand 초콜릿에도 메스암페타민이 함유되어 있었다.


- 가장 큰 효과는 전쟁터에서 나타났다. 약을 복용한 군인들은 겁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피로를 느끼지 못했다. 덕분에 독일군은 땅에서는 전차 운전병이, 하늘에서는 폭격기 조종사가 페르비틴을 먹으며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은 채 맡은 임무를 성실히 해냈다. 독일에서 전쟁 기간 동안 군인과 민간인이 총 1억 정의 페르비틴을 복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독일 인구가 7,000만 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양이 아닐 수 없다. 군인뿐 아니라 군수 공장의 노동자들 또한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페르비틴만 한 피로회복제가 없었다.


히로뽕에 빠진 채 이어가던 전쟁은 1945년 추축국의 주요 나라인 일본과 독일의 항복 선언으로 마무리되었다. 세계의 추축(중심 축)이 되고 싶었던 나라는 실패했다. 하지만 히로뽕은 패배하지 않고, 진정 추축이 되었다. 패전 이후의 무력감에 찌든 많은 일본인이 술이나 식료품을 살 돈으로 히로뽕을 사 위안을 얻었고(독일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세계로 세계로 널리 수출했다. 전쟁에서는 패배했지만 어쨌든 정신적으로 전세계인을 지배하고 황폐화 시킨 것이다.


전쟁 후, 고급 기술인 히로뽕 제조기술은 재일교포 교수님(뽕 제조 기술을 가진 사람을 지칭하는 은어)을 통해 한국에도 전해져, 70~80년대 對일본 수출 효자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한국은 아시아의 뽕 제조 중심 국이자 소비국이 되었다. (가까이에 만든 물건이 있으니 수출도 하고, 내수용으로 풀리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이후 공권력의 대대적인 단속과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개도국에 뽕 제조는 전수하고, 오로지 소비의 중심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폐해를 접하고 있다.


히로뽕이 어떻게 개발되었고 어떻게 우리나라에 전달되었는지 찬찬히 살펴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전쟁은 더 말이 안 된다. 왜? 어떤 이유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죽어야 하나? 아프간과 이라크의 국민들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아이러니는 뽕의 발명과 전파 과정의 아이러니를 외려 축소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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