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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술 좀 마시나?

회식 3부작 중 그 첫 번째

by 바그다드Cafe

"니 술 좀 마시나?"

15년 전 제가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을 때, 저의 사수한테 처음으로 들은 질문이었습니다. 새끼 오리는 알에서 깨면 처음 보는 동물을 엄마라고 믿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직장인인 저에게는 회식과 술이 직장에서는 엄마 오리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이런 회식 문화는 우리나라 산업화 시대의 유산입니다. 70-80년대 고도성장기, 기업들은 회식을 통해 직원들의 소속감을 높이고 단결력을 다지고자 했죠.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구호 아래, 술자리는 의무가 되어갔습니다. 개인의 삶보다 회사를 우선시하던 그 시절의 유산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죠.

15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요? 과거에 비해 정도가 덜하기는 하지만, "저는 술을 잘 못 마십니다"라는 말은 마치 "저는 일을 잘 못합니다"만큼이나 여전히 큰 결격사유입니다. 소주 한 병을 비우는 것이 엑셀 천 줄을 다루는 것보다 더 중요한 업무 능력이 된 것입니다.

"오늘 저녁 먹으러 가자!"

이 한마디에 사무실이 순식간에 초상집이 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갑자기 복통이 오고, 며칠 전부터 잡아놓은 약속이 생각나고, 강아지가 아프다는 변명거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압니다. 이 자리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회식 자리의 서열은 마치 조선시대 신분제보다 더 엄격합니다. 말단 사원은 상사의 빈 잔을 놓칠세라 매의 눈으로 감시해야 하고, 과장님의 잔이 비기도 전에 자신의 잔을 비우는 것은 청나라에 대한 반역과도 같은 큰 죄악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권위주의적 문화는 일제강점기와 군사정권을 거치며 더욱 강화되었다고 하네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벗어나고자 했던 그들의 문화를 회식이라는 이름으로 고스란히 이어받은 걸지도 모릅니다.

술자리의 '건배사'는 또 어찌 됩니까? "우리 회사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하고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퇴사'를 세 번씩 외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원샷!"을 외치는 순간, 간 수치가 실시간으로 올라가는 것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회식 다음 날 아침, 사무실은 마치 좀비 영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 어제의 기억을 더듬으며 "혹시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직원들, 속이 쓰려 관자놀이를 붙잡고 있는 대리님 그리고 어젯밤 일을 기억도 못 하시는 듯 멀쩡한 상무님까지.

심지어 회식 자리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평소에도 말 많은 상무님은 흥에 겨워 노래방 애창곡 '비나리'를 부르기 시작하시고, 평소 조용한 부장님은 애절한 트로트 가수로 변신하십니다. 이쯤 되면 '회식'이 아니라 '회한'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다행히도 MZ세대의 등장으로 이제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야근은 입사 때부터 있었지만, 회식은 퇴사하면 없어집니다"라는 명언(?)도 등장했죠. 점심 회식, 캔맥주 한 캔으로 끝내는 미니 회식, 심지어 '방구석 회식'이라고 하여 각자 집에서 배달음식을 시켜놓고 화상으로 건배하는 새로운 문화까지 생겼습니다.

이제는 진정한 변화가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가 시도해 볼 수 있는 대안들도 있습니다.

첫째, '회식 선택제'의 도입입니다. 한 달에 한 번, 팀원들이 원하는 회식 방식을 투표로 정하는 겁니다.

둘째, '회식 시간 인증제'입니다. 회식은 저녁 6시에 시작해서 8시면 끝납니다. 마치 신데렐라의 마법처럼요. 8시가 되면 모든 직원이 자동으로 호박이 됩니다... 아니, 귀가합니다.

하지만 그전에, 오늘 회식은 어쩔 수 없이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상무님이 벌써 제 모니터 앞에서 서성이고 계시네요. "아... 오늘은 무슨 핑계를 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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