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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의 점심과 석굴암

변한 건 석굴암이 아니라 나였다

by 바그다드Cafe

며칠 전, 후배와 점심을 먹으며 연휴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한 후배는 아이를 데리고 경주로 간다고 했습니다.


"아, 경주 좋지. 요즘 날씨도 좋고."


제가 맞장구를 치자, 자연스럽게 서로 경주에 대한 기억을 꺼내게 됐습니다. 누구는 경리단길의 맛집을 이야기했고, 누구는 안압지 야경을 감탄했습니다. 저는 석굴암 얘기를 꺼냈습니다.


석굴암.jpg 석굴암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30년 전, 초등학생 때 수학여행으로 경주를 갔습니다. 그때 석굴암을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단하다'는 감탄과 함께, 막연히 거대하고 신비스러운 무언가를 본 느낌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마흔이 넘은 어른이 되어 다시 경주를, 불국사를 찾았습니다. 왠지 모르게 설렘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본 그 위대한 유적을, 이제는 다 큰 어른의 눈으로 다시 본다는 기대감이랄까요. 그래서 그때도 굳이 불국사를 지나 산속에 있는 석굴암을 보러 갔습니다. 하지만 막상 석굴암 앞에 서는 순간, 묘한 배신감이 밀려왔습니다.


"어...? 이렇게 작았나?"


기억 속에서는 거의 바위산 절반을 깎아 만든 듯한 장대한 이미지였는데, 실제로 마주한 석굴암은 생각보다 아담하고 소박했습니다. 살짝 당황스러웠습니다. 30년 동안 부풀어 오른 건 석굴암이 아니라, 제 기억이었구나.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석굴암이 작아진 게 아니라, 내가 커버린 거라는 것을요.


살다 보면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기억은 시간과 함께 살이 찌고, 현실은 그대로인데, 나만 쑥쑥 커져버린 걸 깨닫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문득, 점심을 먹던 제 모습도 겹쳐 보였습니다. 학창 시절, 점심시간은 하루 중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식당 앞에 줄을 서면서, 오늘은 어떤 메뉴가 나올까 기대했습니다. 가끔은 몰래 도시락을 까먹으며 들떴던 그런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직장 초년 시절만 하더라도 점심시간은 소중했습니다. 부장님 눈치를 슬쩍 보긴 했지만, 그래도 메뉴를 고를 때만큼은 왠지 세상이 나를 기다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12시가 되어도 허겁지겁 자료를 정리하고, 슬쩍 주변 눈치를 보다 겨우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식당에 가서도 메뉴를 고르는 게 아니라, 머릿속으로 '오늘 남은 미팅 몇 개더라'를 계산합니다. 심지어 밥을 먹으면서도 핸드폰을 슬쩍 보며 메일을 확인합니다.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은 옛말이 되었습니다. 요즘은 "밥 먹으면서 일하는 거 아니야?"가 더 자연스럽습니다. 점심은 여전히 12시에 찾아오는데, 나는 이미 거기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식판 앞에 앉아 있어도, 마음은 이미 회의실이나 만들다 만 PPT에 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점심시간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석굴암도 변하지 않았고요. 바뀐 것은 세상이 아니라, 저의 속도, 저의 시야, 그리고 저만의 여유였습니다. 어릴 적에는 뭐든 대단해 보였고, 쉽게 감탄했습니다. 놀이공원도, 방학 때 갔던 시골집도, 모두 거대한 세계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때 끝도 없이 길게 느껴졌던 골목길조차, 세 걸음이면 건너갈 수 있음을 압니다. 우리가 자란다는 건, 세상이 작아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변화는 서글픈 게 아니라,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미까지 작아지는 건 아닙니다. 작아 보이는 석굴암이 여전히 천 년을 지켜온 신비를 품고 있듯이, 짧아진 점심시간에도 여전히 삶의 온기가 숨어 있습니다. 며칠 전 점심시간에도, 후배와 나눈 짧은 대화 속에도,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꺼낸 경주 이야기에서, 어릴 적 수학여행의 추억이 떠오르고, 그 안에서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점심시간은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대화와 웃음은 생각보다 깊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요. 짧고 평범해 보이는 하루하루 속에도, 사실은 오래도록 남을 울림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걸 알아차릴 마음의 여유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석굴암도, 점심시간도, 변한 게 아니라 변한 나를 비추고 있습니다.


monk-4665182_640.jpg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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