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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같이 술 마시고 싶은 사람

당신이라면, Call!!

by 바그다드Cafe

직장생활 15년 차.


이쯤 되면 ‘술자리’라는 단어만 들어도 고개를 한 번 돌리고, 가슴을 한 번 쓸어내리게 됩니다. 처음에는 모든 술자리가 중요해 보였습니다. 회식, 회의 후 저녁, 사내 친목 모임, 선배들과의 반 강제적인 뒤풀이까지.
그래서 한때는 출근하면, 다음 날 귀가하는 날이 많았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릅니다.


46개월 된 늦둥이 아들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 말을 가장 열심히 듣고, 또 제가 제일 좋아하는 ‘아이 목소리 성대모사’를 해주는 존재입니다.

그 아이와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 그리고 그 아이의 주양육자(저의 아내)의 눈치를 읽는 일은, 어느 순간 저에게 있어 ‘1순위 일정’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관계를 모두 끊을 수는 없기에, 저는 술자리 생존 전략을 나름의 원칙으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1. 무조건 참석해야만 하는 자리

예컨대, 고객사와의 미팅 후 술자리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을'의 본능을 200% 발휘해야 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이럴 땐 잔을 들고 있지만, ‘마시는 흉내’의 기술이 발휘됩니다. 고급 영업 기술이죠. 눈빛은 공손하고, 잔은 비워지는 듯하지만 속은 비워지지 않는, 마치 전통 무술의 경지처럼 ‘눈으로 마시는 술’입니다.

"진 팀장(중국어로 김은 진입니다), 한잔 해야지~"라는 말에는 활짝 웃으며 따르되, 속으론 "내일 아침을 위해 체력 세이브!"를 외칩니다.

그리고 다음 날 토요일 아침, 아이가 아침밥을 질질 흘리더라도, "그래, 내가 어제 잘 버텨서 이 아침이 가능하다"는 작지만 뿌듯한 감정이 밀려옵니다.

2. 선택 가능한 자리라면, 사람을 봅니다

제가 술자리를 선택하는 가장 큰 기준은 ‘누구와 함께하느냐’입니다. 왜냐하면 술은 결국 시간을 공유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과의 술자리를 유독 좋아합니다.

첫째,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

술자리에 앉자마자 "그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사람과는 솔직히 피곤합니다. 그 말이 1번 나오는 건 괜찮습니다. 2번도 참을 수 있어요. 그런데 3번 이상 반복되면, 그 자리는 타임머신이 되어버립니다.


저는 타임머신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타임머신을 타면 멀미가 나는 체질이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술을 많이 마시면 변기를 붙잡는데, 타임머신으로 인해 더 어지러울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말에는 보통 두 가지 심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에 대한 불만, 다른 하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회고적 자아 방어(retrospective defense)라고 부릅니다. 현재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과거의 찬란했던 순간으로 후퇴합니다.


“적어도 그땐 괜찮았지.”
“예전엔 인정받았었는데…”

이렇게 과거의 기억을 끌어내어 자존감을 지키려는 심리는 일시적으로 위로가 될 수 있지만, 대화를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점점 피로감을 줍니다.

술이 과거에만 머물면, 그 자리는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 되기 쉽습니다. 상대는 듣는 척하고 있지만, 마음은 이미 집에 가고 있죠.

둘째, 미래를 상상하며 말할 줄 아는 사람

"요즘 이런 거 한 번 해보고 싶은데..."
"조금 더 배우면 이런 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부족하지만, 나중엔 이렇게 만들어보고 싶어."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사람은, 술자리를 '아이디어 회의실'로 만들어줍니다.

그들의 말에는 대개 희망적 자아 형성(prospective self)이라는 심리가 깔려 있습니다.
즉,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통해 지금의 자신을 의미 있게 해석하는 능력입니다. 이들은 현재의 실수나 한계를 단지 ‘과정’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과거를 애써 감추거나 과장하지 않고, 오히려 미래를 위해 웃으며 풀어낼 수 있습니다.

그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현재에서 출발하지만,
미래를 바라보며 끝이 납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과 마신 다음 날은 숙취보다 기분 좋은 자극이 남습니다.


"그래, 나도 이렇게만 살면 안 되지."
"이번 주말엔 뭔가 해볼까?"


술이 각성제가 될 때도 있습니다.

셋째, 유쾌한 사람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정말 좋아하는 술자리 유형. 바로 웃긴 사람과의 술자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웃긴 사람이란, 개그를 던지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회사에서 실수한 에피소드를 스스럼없이 말하면서도, 그걸 미화하거나 핑계 대지 않고, 그냥 웃긴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애쓰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 자신을 해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과의 술자리는 그냥 ‘재미있다’는 수준을 넘어서, 어떤 여유와 자신감, 그리고 삶의 유연함이 느껴집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웃긴 사람들은 대부분 미래지향적인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지 못합니다. 자기 이미지를 지키느라 유머도, 셀프디스도 어렵습니다.

반면 앞을 바라보는 사람은 과거를 가볍게 넘깁니다. 스스로를 우습게 볼 줄 아는 사람은, 대개 자신의 내일을 긍정적으로 믿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고민합니다

이 술자리가 나를 지치게 만들까?
아니면 나를 웃게 만들까, 혹은 생각하게 만들까?

같은 맥주 한 잔이라도, 누구와 마시느냐에 따라 그다음 날이 미래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아이와 그림책을 읽다 말고,
카톡으로 온 술자리 제안을 슬쩍 읽어봅니다.

그 사람이 어떤 대화를 하는 사람인지 떠올리고, 미래를 말하는 사람인지, 웃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인지 곰곰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46개월 된 아이와 그 아이의 주양육자의 눈치를 보며 살며시 답을 보냅니다.

"당신이라면, 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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