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지면 주변 풍경의 색감이 한층 누그러진다. 은행잎은 황금빛을 더하다 못해 바람 한 번에 우수수 떨어져 길 위에 수북이 깔리고, 사람들은 두꺼운 옷을 꺼내 입지만 서늘한 공기에 옷깃을 다시 여미게 된다. 오늘은 11월 22일. 계절은 이제 겨울을 향하고 있었다. 이 시기가 되면 나는 늘 겨울맞이 화단 정리를 한다. 한 계절을 버텨온 풀들을 잘라내고 흩어진 낙엽을 모으며 집 주변을 정리한다. 이 작업은 겨울을 맞을 준비이면서, 동시에 내년 새로운 봄을 맞기 위한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정원 정리를 마치면 나는 자연스럽게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우리 집을 둘러싸고 있는 골목길은 물론이고 우리 집과 붙어 있는 심 씨네 골목도 오래전부터 내가 맡아 정리해 왔다. 심 씨 집은 사실상 빈집이나 다름없다. 부산에서 바쁘게 생활하는 그가 이곳까지 신경 쓰기엔 삶이 여유롭지 않은 듯하다. 다소 떨어진 텃밭조차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걸 보면 그 사정이 어렴풋이 짐작된다. 그래서 심 씨네 집을 둘러싼 골목길 정리도 자연스레 내가 맡아 하게 되었다.
그저께, 담벼락 밑에 자라난 풀을 뽑고 여기저기 흩어져 굴러다니는 낙엽을 쓸던 중 뜻밖의 풍경을 만났다. 깊어가는 가을 한가운데 하얀 민들레 여러 송이가 피어 있었다. 노란 민들레는 종종 보였지만, 눈처럼 희고 고운 민들레는 그 존재만으로도 잠시 나를 멈춰 세웠다. 가을 끝자락에 피어난 꽃은 더 없이 연약해 보였지만, 동시에 어떤 고집스러움이 느껴졌다. 계절의 흐름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때에 맞춰 ‘나는 지금 피고 싶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래서 그 고운 꽃들은 치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지켜주어야 할 작은 생명처럼 느껴졌다. 나는 낫과 빗자루를 거두고, 그 흰 민들레만을 비켜가며 조심스레 정리를 마쳤다.
오늘 아침 산책길에 돌아오면서 다시 그 자리 앞을 지나보았다. 꽃은 이미 지고 없었다. 대신 흰 관모가 남아 바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는 이미 날아갔고, 남은 몇 송이만이 가느다란 줄기에 매달려 있었다. 아침 햇살에 비친 그 모습은 마치 누군가의 마지막 미소 같았다. 곧 떠날 준비를 마친 얼굴, 더 먼 곳으로 흩어질 각오를 한 마음. 나는 그 앞에서 한참이나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흰 민들레의 꽃말은 “내 사랑 그대에게 드려요” 라고 한다. 새하얀 꽃잎이 품은 그 뜻이 아침의 공기 속에서 새삼 가슴에 와닿았다. 곧 다가올 겨울의 차가움과 대비돼서일까. 사람들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묘한 설렘을 느낀다고 하지만, 그 설렘 뒤엔 늘 삶의 무게가 낮게 깔려 있다. 혹독한 취업난, 치솟는 물가, 빠르게 변하는 세상… 예전보다 분명 더 ‘잘살게’ 된 시대라 하지만, 어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차가운 현실 속에서 버거움을 견디는 이웃들이 있다. 다만 우리가 그들을 제대로 보지 못할 뿐이다.
추워질수록 사람에게는 온기가 필요하다. 따뜻한 말 한마디, 미소 하나, 작은 배려 하나가 유난히 간절해지는 계절이다. 그런데 사랑이란, 누군가에게서 받은 사람이 더 잘 건넨다. 따뜻함을 경험한 사람만이 다시 다른 이에게 따뜻함을 나눌 수 있는 법이다. 그래서인지 민들레의 흰 관모가 바람을 타고 퍼지는 모습을 보면, 그것이 단순한 씨앗이 아니라 ‘전해 받은 사랑’을 다시 흩뿌리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누군가를 향해 가볍게 날아가 자리 잡고, 다시 또 다른 꽃이 되어 세상에 사랑을 돌려주는 과정.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과 닮아 있다.
민들레 씨앗은 아주 작다. 손끝에 올려놓으면 금세 날아갈 만큼 가볍다. 약하게라도 바람이 불면 지금 남아 있는 씨앗들도 어디론가 날아 갈 것이다. 이 씨앗은 작지만 하나가 뿌리내리는 순간, 또 하나의 생명을 만든다. 우리가 건네는 작은 관심, 작은 온정도 마찬가지다. 그 작은 사랑이 누군가의 삶에 뿌리내리면, 그 사람은 다시 또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퍼뜨린다. 그렇게 사랑은 이어지고 번져간다. 마치 바람을 타고 세상 곳곳으로 흩어지는 민들레 씨앗처럼.
계절이 바뀌는 문턱에 서서, 나는 조용히 꿈을 꿔본다.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 계절에 우리들의 사랑이 조용히 흩뿌려지고, 그 씨앗이 머문 자리마다 작은 온기가 피어나길.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가 말해주지 않아도 세상 어딘가에서 하얗게 피어난 작은 꽃을 보며 “아, 누군가의 마음이 여기까지 날아왔구나” 하고 미소 지을 수 있기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