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침묵 속에 머문다

by 정용우

시월이다. 여름 마당을 가득 채웠던 꽃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꽃무릇, 백일홍은 어느새 빛을 잃었고, 수국은 가지치기까지 마쳤다. 눈앞에서 물러나는 꽃들의 색은 계절이 조용히 다음 장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알린다. 한때 생명으로 분주했던 시간은 서서히 속도를 늦추고 있다. 바람은 가벼워지고 햇살은 낮게 드리운다. 활기의 계절에서 침묵의 계절로 접어든 이 시점, 자연은 말없이 삶의 리듬을 속삭인다.


침묵이 익숙해지는 계절이다. 만물이 한 겹씩 말라가며, 존재의 자취를 차분히 정리해가는 시절. 자연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침 공기에는 서늘한 기척이 스며들고, 가지 끝에 매달린 잎사귀들만이 바람에 살며시 몸을 흔든다. 이런 침묵 속에서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를 더 또렷이 듣게 되고, 그로 인해 삶의 의미를 곱씹게 된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이 조용한 계절 속에 깃든 깊은 침묵은 마치 오래된 악보처럼 들린다. 자연이 하나둘 자신의 색을 거두며 내어주는 이 여백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더 충만해질 수 있다.


우리는 쉽게 적응하는 존재다. 반복되는 일상에 익숙해지면, 그 속에서 더 이상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삶이 지루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사람들은 거대한 변화나 획기적인 사건을 통해 행복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종종 허탈함만을 남기고, 결국 행복이라는 감정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곳, 우리의 일상에 숨어 있다. 행복은 번쩍이는 쾌락이 아니라, 잔잔히 오래 가는 만족감에 더 가깝다. 자극적인 쾌락은 금세 휘발되지만, 일상 속 작은 충족감은 천천히 마음을 채운다. 이를 위해 우리는 ‘행복감을 느끼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일상의 소소한 경험들을 음미하고 즐길 수 있는 감각이 필요하다. 매일 걷던 길 대신 골목 하나를 돌아보는 일,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나뭇잎을 바라보는 일, 우연히 찾은 값싼 맛집에서 작은 만족을 느끼는 일. 이런 것들이야말로 일상의 ‘맛’을 더해주는 조미료다.


어느 글에서 보았던 것처럼 ‘일상의 경험 미식가’가 되어야 한다. 진짜 미식가는 화려한 요리보다도 제철 재료 본연의 맛을 알아본다. 마찬가지로 행복한 사람은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평범한 시간 속에서 가치를 찾아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멈추어 바라보는 힘’이며, 그 힘은 바로 침묵에서 비롯된다.


프랑스 신경과학자 미셸 르 방 키앵은 “침묵은 행복이다.”라고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말도 하지 않으며 존재를 온전히 느끼는 순간. 침묵은 말없이 우리 자신과 세상에 더 깊이 다가가게 한다. 외부의 소음을 차단할 때 비로소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다. 깊은 침묵 속에서 우리는 자신과 다시 만나고, 내면의 평화를 맛보게 된다.


수천 년간 수많은 종교와 철학이 침묵을 하나의 수행으로 여긴 데는 이유가 있다. 말은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 도구지만, 동시에 오해와 혼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생텍쥐페리는 “언어는 온갖 오해의 근원”이라고 했고, 장자는 “지혜로운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지혜롭지 못하다.”고 했다. 이 말들이 무언(無言)을 무조건 숭상하자는 뜻은 아니다. 말 이전의 마음, 말보다 깊은 감각을 잃지 말자는 경고다.


지금 우리는 말이 넘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과 SNS는 매일같이 수많은 정보를 쏟아내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생각보다 말이 앞서고, 진심보다 반응이 앞선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내가 내뱉는 말이 어디에서 흘러나오는지’를 자주 되돌아봐야 한다. 침묵은 단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함석헌 선생은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라는 시에서, 세상의 소리와 냄새를 끊고 맑은 등잔 하나만을 켜놓는 침묵의 공간을 말했다. 그곳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다. 신과 진리의 소리, 그리고 나 자신이 내는 소리다.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침묵은 고독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외로움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세상과의 연결을 깊이 있게 느끼는 시간이다. ‘말하지 않음’은 ‘존재하지 않음’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지금 이 순간,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자. 바람 소리, 나뭇잎의 흔들림, 그리고 가끔은 자신의 숨소리까지 들린다면, 우리는 이미 행복의 문턱에 서 있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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