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한 친구가 내 칼럼을 읽고 정성 어린 답글을 보내왔다. 그 고마움에 나는 우리 집 화단에 피어 있는 닥풀꽃과 맨드라미꽃 사진을 함께 보내주었다. 며칠 뒤,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
“닥풀은 품격이 있고 맨드라미는 화려하네. 여기 철없는 연꽃 한 송이 보냄.”
사진 속 연꽃은 계절의 끝자락에 이제 막 꽃을 피운 모습이었다. 주변의 다른 꽃들은 이미 지고 씨앗을 맺고 있었지만, 이 연꽃은 이제야 자신의 철을 맞이한 듯 조용히 피어나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사람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같은 햇볕과 같은 물을 받고도 꽃마다 피는 시기가 다른 것처럼, 사람도 각자의 속도로 살아간다. 그 속도를 섣불리 평가할 수는 없다. 늦게 핀 꽃은 결코 실패한 꽃이 아니다.
나는 어린 시절, 공부가 느린 친구를 ‘지진아’라고 놀리던 기억이 난다. 그때마다 우리 할머니는 아이의 어깨를 다독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되면 다 된다. 너무 서두르지 마라.” 할머니는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삶을 살아내며 터득한 지혜는 깊고 단단했다. 계절 따라 밭을 일구고 자식들을 키워내며 자연의 이치를 몸으로 배운 분이었다. 그분의 말처럼,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었다.
노자는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 했다. 큰 그릇은 늦게 완성된다는 이 말처럼, 우리는 모두 각자의 때를 품고 살아가는 존재다. 괴테 또한 “성숙이란, 자신만의 속도를 인정하는 것”이라 했다. 이 말은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성장 과정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성숙은 사회적 기준이나 외부의 기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내면의 시간표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자세다. 무리하게 남을 따라잡으려 하지 않으면, 자신만의 페이스로 지치지 않고 꾸준히 나아갈 수 있다. 단기적인 성과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더 의미 있는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삶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끝없이 ‘비교’하며 산다. 누가 더 빨리 성공했는지, 더 많이 가졌는지를 기준 삼고, 그렇게 생긴 조급함이 우리를 안달나게 만든다. 그 중심에는 비교 습관이 있다. 왜 우리는 느림을 참지 못할까.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소셜 미디어다. SNS를 통해 남들의 삶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여다보다 보면, 자신이 뒤처졌다는 느낌을 받기 쉽다. 화려한 성취의 단면만을 보여주는 화면 앞에서 우리는 쉽게 자신을 책망하게 된다. 이럴 때일수록 필요한 건, 비교의 습관을 멈추고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이다. 타인의 성공은 기꺼이 축하하되, 그것을 나의 실패로 연결하지 않아야 한다. 삶의 중심을 잃지 않고 자기 보폭으로 걷는 것, 그 자체가 성숙한 삶이다.
꽃이 저마다 다른 시기에 피어나듯, 사람도 각자의 계절에 맞춰 피어난다. 늦게 피는 연꽃에게 “왜 이제야 피었느냐”고 묻지 않듯, 우리도 누군가에게, 혹은 자신에게 그렇게 물을 필요는 없다. 기다림의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쌓이고 있는 내공, 흙 속에서 천천히 뿌리를 내리는 그 모든 시간들이 결국 꽃을 피우게 한다. 기다림은 단지 ‘시간을 보내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가꾸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짧은 글귀 하나, 사진 한 장이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동을 느낀다. 친구와 주고받은 한 줄 대화가 내 생각을 바꾸고, 하루의 방향을 달리하게 한다. 며칠 전, 친구가 보내준 또 다른 문장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天日無邪 花枝有序! 빠른 것이 무엇이며 늦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방천지에 존재하는 것을 벗으로 두는 그대에게…”
그래, 해는 악함이 없고 꽃은 가지마다 저마다의 질서를 따라 피어난다. 그 질서를 억지로 바꿀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우리는 더 빠르게가 아니라, 더 바르게 가야 한다. 삶은 경주가 아니라 여정이며,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동행이다. 나는 오늘도 늦게 핀 연꽃 한 송이에게 배운다. 조금 느려도 괜찮다고, 아직 내 안의 봄이 끝난 게 아니라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