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헌드리더 Oct 10. 2018

수백 권과 비교할 수 없는 한 권의 책








한 사람을 위한 사적인 서점


사적인서점의 운영 방식은 독특합니다. 미리 예약을 해야만 방문할 수 있고, 서점에 들어올 수 있는 인원도 한 번에 한 명뿐입니다. 이곳에서는 손님이 직접 책을 고르지 않습니다. 손님은 그저 어떤 책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요즘 사는 것이 어떠한지, 무슨 고민이 있는지 저에게 들려주기만 하면 됩니다. 책을 고르는 것은 서점 주인인 저의 몫이니까요. 손님이 돌아가면 저는 오직 한 사람을 생각하며 책을 고릅니다. 그리고 열흘 뒤, 손님에게는 책 한 권과 편지가 배달됩니다. 책을 처방하는 약국 같은 서점, 상담소 같은 서점이라고나 할까요.


차분한 공기, 잔잔히 흐르는 노래, 따뜻한 차 한 잔. 한 사람을 위해 열린 이곳에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 드립니다.
열흘 뒤, 오직 한 사람을 생각하며 고른 책이 배송됩니다.


여기까지 설명하면 심리학을 전공했다거나 상담 자격증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서점을 만든 게 아니냐 물어보시곤 하는데요. 전혀 그렇지 않고요. 사적인서점의 시작은 거창한 포부도, 직업적 사명감도 아닌 좋아하는 일을 나답게, 즐겁게, 지속 가능하게 하기 위한 아주 사적인 고민에서 출발했습니다. 


사적인서점을 열기 전, 홍대 앞 큐레이션 서점 땡스북스에서 3년 동안 근무했습니다. 서점원으로 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책을 살피고 읽는 시간이 늘더라고요. 이번 주엔 어떤 책을 읽었는지, 책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은 무엇이었는지, 제 인스타그램 계정에 독서 기록을 남겼습니다. 게시물이 쌓여갈수록 제가 남긴 독서 기록에 대한 사람들의 피드백도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책을 읽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제가 올린 글을 보고 관심이 생겨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요즘은 한 달에 한두 권씩은 꼭 읽고 있다며 책과의 거리를 가깝게 좁혀주어서 고맙다는 내용이었습니다. 


SNS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서점에서 제가 재미있게 읽은 책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하는 손님이나 거래처분들, 독서모임이나 그 밖의 자리에서 여러 관계로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지혜 씨가 고른 책은 믿고 읽어요"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것이 서점원으로 일하는 동안 제가 느낀 가장 큰 즐거움이자 보람이었지요. 기본적으로 서점은 독자가 직접 책을 고르고 서점원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그 과정을 돕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사람들과 책으로 교감하는 즐거움을 느낀 저는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책의 재미를 전하는 서점을 만들고 싶어졌습니다.





오래 사귄 독서 주치의가 있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갖고 있던 차에 덴마크의 행복 비결을 취재한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를 읽다가 덴마크의 주치의 제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덴마크에는 국민 모두에게 주치의가 정해져 있고, 주치의들은 보통 한 동네에 자리 잡으면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서 일하기 때문에 오래 사귄 동네 친구나 다름없다고 하더라고요. 건강과 인생을 보살피는 덴마크의 동네 주치의처럼 오래 사귄 독서 주치의가 있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자연스레 안부를 묻고 고민을 나누며 베스트셀러 대신 나의 관심과 취향에 맞는 책을 처방하는 서점이 있다면. 덴마크 주치의 제도에서 출발한 아이디어는 한 사람을 위한 책을 처방하는 서점을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습니다.


어서오세요. 한 사람을 위한 사적인서점입니다 :)


2016년 10월, 홍대에서 신촌으로 넘어가는 길목, 조금 허름해 보이는 건물 4층에 사적인서점을 열었습니다. 그해 가을부터 2018년 여름까지 2년 동안 약 700명의 손님이 책을 처방받았습니다.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세 달에 한 번씩 주치의를 찾듯이 정기적으로 책 처방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단골손님들이 생겼습니다. 지방이나 해외에서 시간을 내어 일부러 사적인서점을 찾아주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먼저 책 처방을 받고 간 어머니를 뒤이어 따님이 방문하기도 하고, 부부가 함께, 회사 동료들이 잇따라 찾는 경우도 많았고요. 자신이 느낀 만족감을 주변 사람들에게도 선물해주고 싶다는 요청이 많아 나중에는 책 처방 프로그램 상품권까지 만들게 되었습니다.





사적인서점을 운영하며 얻은 가장 큰 수확



사적인서점을 운영하며 10대부터 50대까지 남녀노소 각양각색의 직업과 사연을 가진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초파리 연구원이나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처럼 낯선 직업을 가진 분들을 만날 때면 내가 모르는 세상을 발견하는 즐거움에 두 눈이 반짝 뜨여 시간 가는 줄도 몰랐지요. 어떤 날은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지친 워킹맘 손님의 고된 하루를, 또 어떤 날은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손님의 고민을 나누었습니다. 취업을 해서, 혹은 취업을 하지 않아서, 결혼을 해서, 혹은 결혼을 하지 않아서, 저마다의 이유로 힘든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어떤 것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쉽게 비난하거나 평가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좁고 얕았던 저의 세계는 넓고 깊어졌습니다. 제가 알지 못했던, 손님의 인생에 등불이 되어준 귀한 책들을 새로이 알게 된 건 덤이고요. 


그뿐인가요. 책을 업으로 삼은 이후로 저는 줄곧 ‘깊이에의 강요’에 시달렸습니다. 나는 너무 가벼운 책들만 읽는 게 아닐까? 이 정도 독서 수준으로 사람들에게 책을 골라주는 일을 해도 되는 것일까? 저보다 학식이 뛰어나거나 독서량이 방대한 손님이 오면 제 바닥이 탄로 날까 무서웠습니다. 하루는 고등학교 국어교사 손님이 서점을 찾았습니다. 손님이 그동안 읽어온 책들의 목록을 살펴보니 제가 읽으려다 어려워 실패한 책들, 읽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한 책들이 많아 주눅이 들었지요. 그런데 손님이 제게 털어놓은 고민은 의외였습니다. 직업이 이렇다 보니 아이들이 책 추천을 의뢰할 때가 많은데 손님이 좋아하는 책은 아이들이 읽지 않는다고, 책을 골라주는 일이 너무 어려워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 사적인서점을 찾았다고 하셨거든요. 


그때 머리에서 번개가 번쩍 내리쳤습니다. 아무리 좋은 책도 상대방의 수준과 취향에 맞지 않으면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는 그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책을 추천한다는 것은 책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없으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요. 책에 대한 깊이는 부족할지 몰라도 저에게는 타인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고 공감하고 소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던 사람들에게 “덕분에 책이 재미있어졌어요”라는 인사를 자주 들을 만큼요. 손님과 얘기를 나누기 전까지 깊이를 채우면 제 삶이 훨씬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인생에서 가장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 그래서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 저를 가장 빛나게 만들고 있었더라고요. 사적인서점을 운영하며 얻은 가장 큰 수확이었습니다.





더 잘하기 위해서

더 오래 하기 위해서


물론 힘든 일도 많았습니다. 서점원으로 책을 파는 것과 서점 주인으로 책을 파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으니까요. 서점 주인이 되어 제가 느낀 가장 큰 고통은 책이 팔리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이 일에 시간과 품을 쏟을수록 공허해진다는 아이러니였습니다. 손님들은 한참 동안 진열된 책을 살펴보다가 책 제목만 사진으로 찍어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적인서점의 도서 목록은 제가 시간과 품을 들여 엄선한 것들이고, 이는 사적인서점의 지적재산권이라 생각해 책 사진은 찍지 말아 달라고 요청드렸습니다. 대부분은 이해해주셨지만, 펜과 종이를 꺼내 메모하거나 제 귀에 다 들리도록 “여기서 사지 마. 온라인 서점에서 사면 10% 할인받잖아”라고 말하는 손님도 있었습니다. 책을 직접 사서 읽고, 어떤 방식으로 소개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책싸개를 제작해서 씌우고… 책을 소개하기 위해 제가 들이는 어떤 노력도 온라인 서점의 가격 할인 앞에서는 무력해질 뿐이었습니다. 책을 전하는 일이 좋아서 서점을 시작했는데, 그 일 때문에 괴로워지는 모순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책만 팔아서는 먹고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일을 벌여 사람을 모으고 수익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도 저를 점점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서점뿐만 아니라 1인 자영업자라면 모두가 느끼는 고민일 테지만 내가 멈추면 모든 것이 멈춘다는 생각에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창전동에서의 사적인서점 시즌 1을 종료하고 10월부터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서점을 그만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잘하기 위해서, 더 오래 하기 위해서요. 


당분간은 물리적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는 서점이 되어 책과 사람 사이를 잇는 일을 꾸준히 이어나갈 예정이에요  :)





내가 고른 한 권의 책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믿음



얼마 전 사적인서점의 지난 2년간의 기록이 담긴 <사적인 서점이지만 공공연하게>가 출간되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나답게 즐겁게 지속 가능하게 이어가기 위한 고민의 흔적이 진솔하게 담겨 있지요. 그 책의 마지막 챕터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내가 고른 한 권의 책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지도 모른다. 

내가 매일 반복하는 일상 너머에는 그런 단단한 믿음이 있다.”


책을 읽은 한 독자분이 그 문장을 인용하며 이런 감상을 남겼습니다. 

“내 손을 거쳐간 무엇인가가 누군가를 바꿀 수도 있을 거라고 믿는 마음은 재능이다.” 


제가 좋아하는 김민철 작가님도 비슷한 내용의 감상을 남겼습니다. 

“‘책을 좋아한다.’ 이 한 문장이 한 사람을 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그 책이 다른 누군가를 더 평온한 마음으로, 덜 우는 밤으로 데려갈 수 있다고 굳건히 믿는 그 마음은 또 무엇일까?”


이 글들을 읽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그 믿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요. 곰곰 생각해보니 저에게는 차고 넘치는 근거들이 있었습니다. 사적인서점을 통해 만난 책들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편지로, 문자로, 생생한 목소리로 전해준 손님들이 제 확신의 증거였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 이렇게 차고 넘치는 행복을,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직업이 얼마나 될까요.





사적인서점은 한 권의 책을 팝니다


사적인서점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다른 서점에 비교하면 장서량이 많지도 않고 매일 문을 열고 책을 파는 곳도 아니니까요. 다른 사람들이 여기가 무슨 서점이야, 하고 생각할까 봐 불안했습니다. 하지만 책 처방을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이곳이 서점인지 상담소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적인서점에서는 한 권의 책을 전하지만 그 한 권이 수십수백 권의 책과 비교할 수 없다는 걸 손님들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으니까요. 


사적인서점은 많은 책을 팔지 않습니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한 권을 책을 권할 뿐이에요.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지도 모르는, 수백 권과 비교할 수 없는 한 권의 책을요.






이 브런치 '위클리 매거진'은 스토리펀딩의 "모험을 시작한 작은 책들" 프로젝트와 함께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참조해 주세요. 작은 출판 컨퍼런스의 내용을 정리한 단행본은 스토리펀딩을 통해 예약 구매 가능합니다.




<사적인 서점이지만 공공연하게>

http://www.yes24.com/24/goods/64692375?scode=029






이전 13화 내 책꽂이에 꽂아 두고 싶은 책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