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고 나면 저기 저 염불 소리 잘 들리는 산에 재를 뿌리 삐라. 화장하고 어디 모시는 거 다 소용없다. "
정말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절이 가까이 있는 산속에 아버지의 뼛가루를 뿌렸다. 그때는 납골당에 모시지 않은 것이 후회되기도 했다. 당신을 추억하며 찾아갈 장소가 없음에, 당신의 뜻이 참 야속하였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10년 즈음 지난 지금, 아버지의 그 뜻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사실 납골당에 찾아간들, 할 일은 절하고 눈물 잠시 흘리는 것뿐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날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적어보려 한다. 그날은 참 추운 겨울날이었다.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00대 백병원 응급실로 달려왔다. 지병이 있으시셨던 아버지는 올해 2월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그때 빨리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와서 다행히 돌아가시지는 않으셨다.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니며 관리를 하시다가 이번에 또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실려 오셨다.
입원실 자리가 나지 않아 응급실에서 삼일 정도 대기하였다. 응급실에 있으면 시간이 멈춘 듯하다. 24시간 불이 켜져 있는 응급실에 있으면 언제가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다. 아버지의 곁을 지키다가 배가 많이 고프면 밖에 나가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들어와서 아버지 옆에 앉아 있었다.
응급실에 좁은 침대에 누워 있는 아버지께 손자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여 드리며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었다. 사는 것이 바빠 고향집에 자주 내려오지도 못하고, 손주 얼굴도 자주 못 보여 드렸다. 응급실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이렇게 오래 보고, 많은 이야기를 할 줄이야.
응급실에서 아버지는 참 고생하셨다. 위 내시경 검사를 해야 한다며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하였다. 물도 거즈에 살짝 적셔 마른입에 묻히는 정도로 먹게 했다. 정말 사람이 물 한 잔 마음대로 벌컥벌컥 못 먹으니, 이보다 괴로울 수가 없다. 그러는 와중에 혈액수치가 너무 떨어져 목 옆에 구멍을 뚫어 다량의 피를 수혈하는 처치를 받기도 하였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너무나도 마음이 아프다.
다행히 입원실 자리가 생기고, 이동하였다. 중환자실과 입원실을 왔다 갔다 하며 힘들게 하루하루를 보내었다. 입원실로 옮기고 나서는 어머니께서 아버지 곁을 지키셨다. 나는 오후에 조퇴를 쓰고 병원에 와서 시간을 보내었다. 이번에는 아버지의 상태가 심각하여 한 번이라도 더 아버지 얼굴을 봐야 할 것 같았다. 아버지의 죽음을 예감하였는지, 매일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 무렵, 밥을 먹기 위해 형과 내가 병원을 나서는 찰나에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네 아부지, 세상 베리삐따(버리다의 경상도 방언). 어서 올라오너라."
저녁을 좀 더 있다가 먹을걸.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지 못하였다. 병실에 올라가니 이미 아버지는 계시지 않았고 어머니는 짐을 챙기고 있었다.
고향에 어머니께서 아시는 장례식장으로 아버지의 시신을 이동하였다. 엄마와 형은 내 차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갔다. 가는 차 안에서 어머니께서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어머니께 손을 잡아 달라고 하셨단다.
"여보, 내 손 좀 잡아주오."
"영감, 저 세상 간다 생각하니 두렵소?"
아버지는 그렇게 엄마의 손을 잡고,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떠나셨다. 많이 두려우셨나 보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그쪽 사람이 우리를 맞이한다. 사람이 죽고 나면 슬퍼할 겨를 없이 해야 할 것들이 참 많다. 장례식장을 꾸밀 때 화환은 어떤 것으로 할지, 밥과 반찬은 어느 수준으로 할지, 아줌마는 쓸지 등 결정해야 할 사항이 많다. 그리고 영정사진. 아버지의 영정사진에 쓸 얼굴 나온 괜찮은 사진을 마련해야 한다. 생각해 보니 내가 결혼할 때 메이크업실에서 찍었던 그 모습이 그나마 나은 것 같다. 그렇게 영정사진을 마련하고 빈소가 차려졌다.
3일장을 치르는데, 아버지께서 저녁에 돌아가셔서 이미 하루는 끝나간다. 당신이 떠나가면서 남겨진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장례를 치르게 하신 배려가 아닐까. 첫날밤은 그렇게 어수선하게 지나갔다. 친척들, 손님들, 친구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아버지를 애도하고 어머니를 위로한다. 다들 바쁘게 살아서 평소에는 얼굴 보기 힘든 사람들이 이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모여서 얼굴 볼 기회가 생긴다. 참 아이러니하다.
둘째 날 저녁,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흡사 잔칫집처럼 떠들고 술을 마시며 사람들이 담소를 나눈다. 손님들을 맞이하고 인사하며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간다. 자정이 넘어 손님들이 다 가고 테이블만 남아있다. 내일 아침이면 출상이다. 사람이 죽고 나면 이리도 정신없이 장례를 치르는구나! 고인을 애도하고 온전히 슬퍼할 시간도 없구나!
다음날 아침 화장터로 이동하였다. 정말로 아버지와의 마지막 작별인 절을 두 번 드리고 화장을 하였다. 시신을 태우는 시간이 꽤 걸렸다. 화장작업이 마쳤음을 알리는 문구가 화면에 뜨고, 유골을 받으러 갔다. 정말 사람이 죽으니 한 줌의 재가 되어 있었다. 재는 엄청 뜨거웠으며,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엄청 고운 가루는 아니고 입자가 거칠었다.
뼛가루를 들고 형과 함께 아버지께서 자신의 재를 뿌려 달라고 하신 산으로 향했다. 염불 소리가 잘 들리는 절 옆에 산길을 따라 걸어가다 인적이 드문 곳에 뼛가루를 흩뿌렸다. 그렇게 아버지는 평소 좋아하시던 염불을 매일 들을 수 있는 산의 바람이 되셨다. 그 작업을 마치고 친척들이 모여 있는 점심식사 장소로 왔다. 장례식 인근 복어국집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고 다들 헤어졌다.
2015년 겨울, 그 해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참 추운 겨울을 보내었다. 그때 이적의 '걱정 말아요. 그대'라는 노래를 듣다가 아버지 생각에 울컥하여 눈물을 많이 흘렸다.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아버지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