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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민 Oct 30. 2022

22.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세하는 찬찬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팔을 뻗어 흐느끼며 잘게 흔들리는 해단의 등에 손을 얹고 천천히 토닥거렸다. 마음속으로 세하는 계속해서 되뇌었다. 괜찮아. 괜찮다. 울어도 괜찮고, 슬퍼해도 괜찮다. 이 마음이 손을 타고 등을 넘어 해단의 마음에 닿기를. 언제든 마음껏 기뻐하고 슬퍼해도 괜찮다는 걸, 부디 이 아이가 기억해주기를. 세하는 간절하게 바랐다.


“선배,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살짝 잠긴 목소리로 해단이 말했다.

“응. 뭔데?” 세하가 말했다.

“저번에 현서 선배가 말해주셨던 날짜, 그거 무슨 날짜인지…” 해단은 우물쭈물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선배의 진짜 생일은 언제인지…”

“춥네.” 세하가 말했다.

“아, 들어갈까요..?” 아무래도 괜한 걸 물어봤다는 생각에 해단의 표정에 근심이 서렸다.

“아니야. 아직 내부 공사 중인 것 같아. 숙소에 들어가도 지금 다 정전된 상태라 보일러 안 돌아가서 추운 건 비슷할 거야. 밤 11시쯤에 끝난다고 하셨으니까, 지금…” 세하는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봤다. “약 두 시간 정도 남았다. 내가 가서 담요 가져올게. 조금만 기다려.”

“네…”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 있다가 담요 가지고 와서 이야기해줄게.” 세하는 어린 동생을 달래듯, 해단의 어깨에 잔뜩 쌓인 듯한 긴장이 조금은 떨어지길 바라며 해단을 가볍게 툭 치고는 한 손에 손전등을 들고 숙소로 향했다.



복도에 세하의 빠른 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세하는 군대 내 대령의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서 말했다. “이런 게 어딨습니까. 무슨 일을 이딴 식으로 처리하시는 겁니까!”

“조용히 하게! 여기가 어디라고 그렇게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나!” 왼손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대령 김호창이 말했다. 안경을 벗으며 호창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자리에 앉게.” 호창이 자신의 책상 앞에 놓인 나무 의자를 가리켰다.

“아니, 앉아서요? 대령님. 이게 지금 앉아서 이야기가 되는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세하의 얼굴이 “대령님, 대령께선 알고 계셨잖습니까. 어떻게 저한테 한마디도 안 해주실 수가 있습니까. 이서가 훈련소 중대장한테 성폭행을 당했었다면서요. 그것도 중대장한테 거의 죽기 직전까지 맞고 있던 어린 병사를 구하려 했다는 벌로. 대령님, 대령님만 믿고 다녀오라면서요. 이서, 잘 지켜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아니, 사람을 이렇게 떠나보낸 것도 말이 안 되는데, 이걸 일 년도 넘게 자살로 덮어두고 있었다는 건 더 말이 안 되잖아요. 대령, 이건 살인이에요“



쿠당탕. 아야… 세하는 앞에 놓인 나무 의자에 부딪히며 발로 찼다. 세하는 자신의 정강이를 손으로 문지르며 생각했다. 어떻게 손전등을 비추고 찾는데도 이렇게 부딪힐 수가 있지..? 담요가 여기 어디쯤에 있었던 것 같은데… 손전등으로 숙소 구석구석을 비추며 세하는 담요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혹시, 담요 필요하세요?”

“네?” 잔뜩 몸을 움츠린 채 땅을 보고 있던 세하가 고개를 들었다. 동갑인 듯하면서도 좀 더 앳되어 보이는 여자 사람이 서 있었다. 학생부 위원인가. “아, 괜찮습니..” 갑작스러운 친절에 당황한 세하는 거리를 두려다가  뜻밖이라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의아한 눈빛을 느꼈다. 그제야 세하는 자신이 어떤 자세로 서 있었는지 다시금 기억해냈다. 분명 봄 날씨라고 듣고  외투를 두고 얇게 입고 나왔던 세하는, 아직 다 지나가지 않은 꽃샘추위에 두 팔로 자신의 몸을 에워싸고 있었다. 세하는 멋쩍게 웃으며,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여자가 건네는 담요를 건네받았다. 세하가 주섬거리며 담요를 몸 아래에 두를 때 즈음 앞쪽 강단에선 대학교 입학식 시작을 알리는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입학식이 끝나고 같은 과 학생들끼리 뒤풀이 겸 신입생 환영회가 있다고 모이라며, 앞에서 과대로 보이는 사람이 말하는 걸 들었지만, 세하의 머릿속엔 빨리 알바를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세하가 알바하는 빵집에서 오늘부터 삼 일간 쿠폰 행사를 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가서 사장님을 도와 드려야 했다. 짐을 다 챙긴 세하가 서둘러 버스를 타러 가려는데 누군가가 세하의 가방을 붙잡았다.

“저기요.” 아까 그 여자 사람이었다.

“네?” 세하가 계속해서 자신의 낡은 손목시계와 여자를 번갈아 봤다. 이번에 오는 버스를 타야 제 때에 도착할 텐데… 세하는 속으로 생각했다.

“담요.” 여자가 세하의 팔에 걸친 담요를 가리켰다.

“네..?” 세하는 대체 뭐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여자를 바라봤다. 아..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그거 주고 가셔야죠.”

“네에..?”

“그거 제 거예요.” 여자 또한 몹시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여자가 도와줬더니 도둑질을 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고 세하는 잠시 생각하다가, 순간 정신을 차렸다. “아, 여기요. 신입생들한테 무료로 나눠주는 줄 알고..”

여자는 담요를 자신에게 내미는 세하를 잠시 바라보다가 “경제학과 맞죠?” 물었다.

“네.”

“저도 같은 과예요. 똑같이 신입생. 지금 그냥 갖고 계셨다가, 있다가 뒤풀이 끝나고 그때 주세요.”

“아, 저는 뒤풀이 안 가요.”

“왜요?”

“그거야.. 제 맘이죠.”

“신입생이면 꼭 다 참석하라던데요?”

“꼭 다일 필요는 없을 걸요?”

“꼭 다라고, 두 번이나 강조하던데.”

왜 초면인 사람한테 이런 것까지 얘기해야 하지. 세하는 잠시 한숨을 푹 쉬더니, “알바가 있어요. 됐나요? 근데 제가 왜 이걸 당신한테 설명하고 있어야 하죠?”

“음.. 그렇군요.” 미세하게 힘이 들어가 있던 여자의 눈 주위의 긴장이 누그러졌다. 세하가 자신의 앞으로 내민 담요를 다시 세하의 앞으로 밀며 여자는 “담요는 다음번에 만나면 그때 주세요.” 말했다.

“제가 그쪽을 언제 다시 만나죠?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이미 버스를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은 세하는 갑자기 열이 오르는지 목 끝까지 채운 셔츠의 단추 하나를 끌러 풀었다. 다음 버스는 한 시간 후에 온다.

“그건 모르는 일이죠. 경제학과라면서요. 같은 과이고 신입생이겠다. 분명 어떤 수업에서든지 한 번은 마주치겠죠. 제 이름은 강이서이에요. 그리고 스무 살. 당신은요?”

버스는 한 시간 뒤에나 오는 마당에 이 이상 뭐가 급할까 싶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세하는 “세하. 세하입니다. 나이는 스물한 살이요.” 답했다.

“언니네요.” 이서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그래도 같은 과 동기니까, 말 편하게 할게. 언니.” 세하를 바라보며 싱긋 웃음 지어 보였다.

세하는 단번에 자신에게 말을 놓는 이서를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뭐 이런 얘가 다 있나 싶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잠시 고개를 휘젓다가, 이내 나이가 뭐가 중요할까 싶어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이서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여기.”

“아, 오셨어요?” 세하가 내민 담요를 받아 들며 “선배, 이거.” 해단이 세하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해단으로부터 건네받은 것을 쥐고 세하는 이리저리 돌려 봤지만, 좀 어두워서 그런지 잘 보이지 않았다.

“나뭇가지예요. 그 선배한테 소중하다던 그 나무의 부러진 나뭇가지가 저기 날아가 있더라고요. 갖고 와서 대봤는데 딱 들어맞았어요. 좀 커서, 그걸로 뭔갈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요. 선배, 목공 하신다면서요.”

“아… 고마워.” 세하는 나뭇가지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잠시 찾아온 적막 사이로 파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섬으로 밀려온 파도는 벼랑에 부딪히는 동시에 하얗게 부서져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파도 소리로 보아, 바다가 아까보단 좀 더 안정된 듯했다.

“그날은,” 세하가 말문을 열었다.  “내 여자 친구 생일이야. 이 나무도 여자 친구가 키우던 거고. 나는 생일이 없어. 내가 언제 태어났는지, 년도는 아는데 몇 월 며칠에 태어났는지 몰라. 년도와 이름만 적힌 채, 보육원 앞에 놓여 있었대. 이름은 한자까지 또박또박 적어두곤 몇 월 며칠에 태어났는지는 안 적어 둘 건 또 뭔지. 하여간 그래서 생일을 안 챙겼어. 모르기도 하고 나를 낳고 버린 사람들이 괘씸하기도 해서. 그냥 안 챙겼었어.”



“뭐? 그런 게 어딨어!” 이서가 소리쳤다. “아니 어떻게 생일을 안 챙길 수가 있어! 암만 그래도!”

“됐어. 빨리 초 불어. 촛농 다 떨어지겠다.” 케이크를 들고 선 세하는 행여 불이 하나라도 꺼질까 봐 초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며 이서에게 말했다.

“안돼. 이렇겐 못해.” 그렇게 말하며 이서는 손을 대충 휘적여 촛불을 꺼트렸다.

“야, 뭐 하는 거야..!” 자신이 지키고 있던 불씨들이 그토록 허망하게 꺼진 걸 보며 망연자실한 세하는 불 꺼진 채 연기만 휘날리고 있는 초들을 허망하게 바라봤다.

그 사이 어느새 옷을 챙겨 입은 이서는 세하에게 “여기서 딱 기다려. 금방 올게. 딱 한 시간 내로 온다, 내가.” 엄청 근엄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여전히 케이크를 들고 넋 놓고 있던 세하는 뒤늦게 이서가 한 말을 깨달으며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미 이서는 어디론가 가버린 후였다. 이서의 생일을 맞아, 세하와 이서는 이서의 집에서 생일 파티 겸 파자마 파티를 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이서의 생일이 끝나기까지 십 분 전이되도록 이서는 보이지 않았다. 이서의 방에 앉아 계속 초조하게 기다리던 세하는 이젠 정말 안 되겠다는 듯이, 이서를 찾으러 나서려 미리 챙겨 입은 옷 위에 잠바를 걸쳐 입곤 방문을 열어재끼려는 그 찰나, 그 앞에 이서가 서 있었다.

“야..!” 족히 두 시간 반 정도는 기다렸던 세하가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하기도 전에, 이서가 울음을 터트렸다. 가만가만 다독여 이서에게서 자초지종을 듣는데, 그냥 오늘 같이 생일 축하하려고, 케이크를 한 개 더 사 오려고 찾아서 돌아다녔는데, 오늘따라 치즈 케이크가 보이지 않았더란다. 세하는 우유 알레르기가 있어서 생크림 같은 걸 잘 먹지 못했다.

자신을 위해 이곳저곳 돌아다녔을 이서가 기특하고 고마우면서도 우는 걸 보니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세하는 시계를 바라봤다. 이제 이서의 생일이 삼 분 밖에 남지 않았다. 남은 초도 기껏 해봐야 다섯 개 정도 되었다. 초 앞에 서서 세하는 잠시 골몰하더니, 주섬주섬 무언갈 하더니 “이서, 고개 들어봐바.” 이서를 불렀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웅크리고 있던 이서가 고개를 들어 보니 눈앞에 초 두 개가 놓인 케이크가 있었다. “각자 한 개씩 맡아서 같이 불자. 난 너랑 같이 뜻깊은 시간을 챙길 수 있다는 거, 그걸로 충분해. 아니, 과분해. 엄청.” 이서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세하의 코 끝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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