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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민 Oct 30. 2022

21.



하늘에는 투명한 물빛의 연푸른색이 한껏 흐트러져 있었고, 물의 표면 위에는 하늘이 담겨 있었다. 세하는 자신의 발아래를 보았다.  지금 수면 위에 서 있었다. 세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광활한 수평선과  하늘만이 맞닿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을 뿐, 그 사이에 있는 거라곤 가운데에 웅크린 채로 있는 아이였다. 

꿈 속이겠지. 세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랜만이네, 이곳도. 언젠가 이곳에 자주 오곤 했었다. 아주 어릴 적에. 이곳에서 여러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아주 사라진 줄 알았는데, 아직 있었구나. 세하는 수평선 위를 걸으며 아이가 있는 곳으로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엔, 드디어 닌자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된 줄 알고 신나서 막 뛰어다녔는데. 세하는 이어서 계속 생각했다. 엄청 멀리 점프하려다가 수평선 아래로 빠져 들어가면서 잠에서 깨어났었다. 이곳의 아이들은 저마다 다양한 표정을 갖고 있었다. 세하가 뛰어다니다가 넘어져 울어도 뭐라 하는 선생도 자신을 따돌리는 아이들도 없었다. 깨어 있는 시간 속에선 이곳 꿈속에 들어올 시간을 기다린 적도 있었다. 

이따금 유난히 키 큰 아이가 다가와 울지 말라는 등 선생과 비슷한 훈계를 하며 어린 세하에게 다가왔지만, 세하에게 닿기도 전에 아이들이 그 주위로 순식간에 몰려들어 그 앞을 막아섰고 동시에, 키 큰 아이는 자기 욕심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수평선 아래로 잠기듯 가라앉아 사라졌다. 

그곳은 마치 아이들만의 안전지대와도 같아 보였다. 그러나 세하가 자라며 시간이 지날수록, 꿈속에 찾아가는 빈도수가 줄어들었고, 그때마다 아이들도 한 명씩 줄어들어 있었다. 오늘처럼 이렇게 한 명만 남아 있는 건 처음이었다. 


세하는 웅크린 아이에게 다가가 옆에 잇따라 쭈그려 앉으며 “안녕.” 말을 걸었다. 

아이의 모습을 보다 세하는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꿈속 아이들 중에는 새하얀 색 옷을 입은 아이가 있었다. 세하가 흰색 옷을 입은 아이를 기억하는 까닭은 그 아이가 자신의 어릴 적 모습과 똑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꿈 속이니까,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도 등장할 수 있는가 보다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세하의 인사에 고개를 든 아이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되어있었다. 아이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현재에 하나씩 꿰어 놓듯, 입을 열어 더듬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세하의 발걸음이 점차 뜸해질 즈음 아이들이 서로 다투기 시작했단다. 또한 항상 잠잠하던 수평선도 이따금 큰 해일이 일며 아이들을 덮쳐 가거나 맑은 하늘이 순식간에 먹구름으로 뒤덮이면서 온종일 비가 와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든 수심으로 뒤바뀌곤 했더랬다. 

세하가 더 이상 이곳의 꿈을 꾸지 못하게 된 건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스스로와 결심한 이후부터였는데, 그때부터 이곳엔 계속해서 비가 왔고 자신을 비롯한 얼마 남지 않은 이곳의 모두가 그 물속에 오랫동안 잠겨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때 이후로 다시 물 밖으로 나오게 된 건 오늘이 처음이라 했다. 눈을 떠보니 아무도 없고 자신만 혼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고. 

말을 마친 아이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끝이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 눈빛이 너무도 슬퍼서 세하는 저도 모르게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 세하의 눈물이 수면 위로 떨어져 내리자 수면에 자그마한 파문이 일며 자그마한 파장에서 점점 큰 동심원을 그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 위에 사람이 걸어 다녀도 아무런 동요가 없던 수면이었는데 말이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듯 하염없이 수면 아래를 쳐다보고 있던 아이는 작게 일렁이는 수면을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보다가, 다시금 세하의 존재를 기억해냈다는 듯 눈을 또렷이 뜨며 세하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이는 눈물을 흘리는 세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괜찮다는 듯이 마음을 가만가만 다독이는 듯한 웃음이었다. 자신도 아이에게 웃음으로 화답하기 위해 세하가 서둘러 눈물을 닦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뜨자 아이도 수평선도 하늘도 다 사라지고 없었다. 사방이 꽉 막혀 있는 듯한 보육원 천장이 세하의 시야에 담겨 있었다. 꿈이 워낙 생생했던 터라 세하는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어 앉고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려 애썼다. 


오늘은 만으로 열아홉 살이 된 세하가 보육원을 나가기로 예정된 날이었다.(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쫓겨나는 거지만.) 대학은 합격했고 첫 등록금도 면제받기로 했다. 하지만 살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집들이 많은데 자신이 살 집 하나 없다는 사실이, 점점 다가오는 겨울바람보다 더 서늘하게 목 주위를 스쳐 지나갈 때면, 금방이라도 죽고 싶다는 생각에 온 몸이 짓눌리는 듯했다. 

이런 때만큼은 세하는 자신이 고아라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고 그 누구도 슬퍼하지 않을 거란 사실이 슬프면서도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남겨진 채로 사는 기분을 아는 건 세하, 자신으로 족했다. 언젠가 자신이 죽을 때, 자신의 죽음으로 하여금 그 누구도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을 느끼지 않길 세하는 자주 바랐다. 세하가 보육원을 벗어나자마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행하려던 계획은 죽는 거였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서. 세상에 태어나 여전히 간절하게 바라는 건 죽는 거라고 세하는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단이라는 아이가 툭 내뱉은 듯한 한마디를 통해 깨달았다. 울고 싶을 땐 마음껏 울라는 그 말을 통해서. 사실은 자신이 지독히도 울고 싶었다는 걸, 실은 울어도 괜찮다는 말을 너무도 듣고 싶었다는 것을, 참아낸 울음이 가슴에 가득하여 물속에서 숨을 쉬고 있는 듯한 갑갑함을 내뱉고 싶었다는 것을. 그 아이의 말이 귀에 닿자마자 그 모든 만류를 제치고 앞다투어 감정의 출구를 나가 쉴 새 없이 흘러내리던 눈물들을 보며 비로소 인정했다. 


또한 꿈속에서 마주한 그 아이가 바로 세하가 스스로 외면했던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물이 채 다 마르지 않은 눈동자를 길게 늘어 뜨리며 슬며시 웃던 그 아이의 웃음 속에 담긴 다독임은 모종의 용서처럼 느껴졌다. 그 아이를,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를 외면하고 살아왔던 세하를 다 이해한다고, 그 마음을 알고 있으며, 그저 괜찮다고.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 따스한 이해에, 얼은 줄도 몰랐던 마음에 낀 성에가 깨지고 녹아내리며, 세하는 마음이 시리면서도 따뜻하고 아프면서도 간지러워지는 걸 느꼈었다. 그랬다. 죽고 싶다고 말했던 그 순간들은 사실 살고 싶다고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외치는 거라던, 저명한 책들 속 흔히 있는 말이 유독 낯설고 새롭게 다가왔다. 사실은 이 생을 사람답게 잘 살아내고 싶다는 단 한 찰나의 깨달음은, 세하 자신이 죽고 싶다고 외치는 거라 믿었던 지난 무수한 시간의 말들이 자기 스스로에 의해 오역된 것들이었음을, 그 어떤 목소리보다도 큰 소리로 살고 싶다며 열성적으로 외치고 있었더라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보육원을 떠나기 위해 자신의 몇 안 되는 짐을 챙기는 세하의 손짓은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찼다. 나가서 뭐라도 해 볼 심산이었다. 알바를 하던 뭐든. 어릴 적 꽤 오랫동안 할아버지 관장님께서 공짜로 가르쳐 주셨던 복싱 기술 겸 호신술도 있겠다, 설령 밤길에 괴한을 만나더라도, 일단 주먹을 괴한의 얼굴 정면으로 질러 코 때기를 아작 낸 다음, 정강이 사이를 걷어 차곤 냅다 도망치면 된다. 한껏 온 얼굴로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 있는데 그때 누군가 세하의 오른쪽 팔꿈치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세하와 세 살 차이가 나는 남동생 이찬이었다. 

무슨 일이냐는 듯이 세하가 고갯짓으로 까닥하며 찬에게 물었다. 


“오늘, 간다매.” 찬이 말했다. 

“응.” 마저 짐을 챙기며 세하가 말했다. 

“어디로.”

“몰라.”

“자기 가는 곳도 모르냐.”

“그럴 수도 있지.”

“그래, 아무튼. 고마웠어, 누형.”

“뭐가? 그리고 누님인지 형인지 하나만 해라 이것아.” 세하가 웃으며 찬에게 장난스레 꿀밤을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아니야. 누형을 부르기엔 누형이 최적이야. 누님과 형님을 아주 한 데에 다 갖고 있어, 누형은.”

“어휴.”

“고마운 건. 뭐, 누형도 알다시피. 나는 남들보다 여기 보육원에 좀 크고 난 다음에 들어와서, 정말 많이 겉돌았는데, 누형 덕택에 잘 적응할 수 있었어. 고마워.”

“일 없다~”

“어?”

“어제 배운 표현이야.” 세하가 짓궂게 웃었다. “괜찮다는 뜻이야.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나도 너한테 고맙다고 말해야 할게 수두룩 하지. 나도 너 아니었으면 이 보육원 진작 탈출했다. 덕택에 견뎠어. 고마워, 짜샤.” 

“오랜만에 훈훈하네. 가자. 정문까지 바래다줄게.” 찬이 말했다.


정문 앞에 선 채로, 세하는 자신이 있었던 보육원의 전경을 쭉 돌아봤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이곳에서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곳에서 만기 기한을 다 채우고 살아서 나가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정말 여러모로 쉽지 않은 곳이었지만, 그래도 이곳에 심긴 나무들만큼은 참 좋아했다. 봄이면 분홍, 흰 빛의 꽃이 피는 벚꽃나무도, 여름의 초록도, 가을의 형형색색도, 겨울의 고요한 흰색으로 반짝이는 눈꽃들도 정말 참 좋아했다. 보육원에서 멍 때리는 시간의 칠 할은 나무 정원을 바라보는데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연락해.” 옆에 서 있던 찬이 말했다. 

“그래, 관장님 기일 때마다 만나서 같이 산소에 뵈러 가자.” 세하가 말했다. 

“내년이 삼 주기인가.”

“응.”

“누형, 이번에는 관장님이 좋아하시는 밤 막걸리 꼭 빼먹지 말고 오고.”

“그래, 알았어. 너도 스무 살 되면 관장님 제사 끝나고 밤 막걸리 한 잔 하자. 내가 형님으로서 한 잔 사줄게. 그때 되면, 그 정도 돈은 있겠지, 뭐…”

“그래, 얼른 가.”

“그래, 갈게. 이찬, 무슨 일 있을 땐 꼭 전화해.” 

“그래, 알았어.” 찬이 시원하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이것 봐, 누형 맞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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