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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민 Oct 30. 2022

19.

- 읽으며 들으면 좋은 플레이리스트 : ( https://youtu.be/39DBA_Suck8 )




어느새 하늘엔 달이 떠 있었다.

“참, 이상하죠.” 해단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달을 보면, 그 사람 눈동자가 생각나요. 저기 보름달처럼 참 동그랬거든요. 그냥 단순히 모양만 닮은 게 아니라, 저 달처럼 아름답게 빛났어요. 그 눈을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다시 보고 싶어요.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해요. 그 사람 눈을 다시 마주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이름을 알기 위해서 이렇게 살아 있는 걸까 싶어요.”

세하는 달을 올려다 봤다. “무척 아름다운 눈이었겠군요.”

“네. 무척요.” 슬며시 미소 지으며 답하는 해단의 얼굴에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바다 위로 내려앉은 달빛이 일렁이는 물결을 따라 잘게 반짝이는 모습이 꼭 풀벌레의 울음소리와 닮았다고 생각하던 해단은 문득 잇따라 딸려 온 기억을 건져냈다. 


“그러고 보니 선배, 기억 안 나세요?” 

“뭐가요?” 

“저요.”

무슨 소리냐는 듯이 세하가 해단을 쳐다봤다. 

“저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보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게슴츠레 눈을 뜨고 해단의 얼굴을 요리조리 바라봤지만 세하의 기억 속에  해단의 모습과 맞물리는 장면이 없는 듯했다. “지나가다 본 건가요..?” 기억나지 않는 듯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로 세하가 물었다. 

해단은 잠시 세하의 눈치를 살피는 듯하더니, “선배, 강진 보육원 나오셨죠.” 말하곤 자신의 발끝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그곳에서 잠시 머물 때에 선배를 본 적이 있어요.”

세하는 그게 언제냐는 듯이 해단을 빤히 쳐다봤다. 

“선배가 저한테 보육원에 있는 뒷산 주셨잖아요. 선배 것도 아니면서.” 툴툴거리며 말을 하고 있지만 해단의 말소리에 웃음이 가득 배어 있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세하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아..! 그때, 그, 화내던 꼬맹이!” 말하며 저도 모르게 반가움에 눈을 반짝이며 해단을 바라봤다. 

“꼬맹이라니 그건 너무 심했죠. 그때 선배 저랑 키 똑같았잖아요. 선배도 피차일반이었으면서, 누가 누구보고 꼬맹이래. 물론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크셨지만요.” 

단 번에 꼬맹이라 뱉은 게 미안했는지 세하는 헛기침을 하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고마워요. 선배가 주고 간 그 뒷산 꽤 쓸모 있더라구요. 화날 때마다, 삶이든 저 자신한테든 세상이든 신이든 뭐든 하여간에 도무지 분통이 풀리지 않는 날이면 그 산을 타고 올라가 소리 질렀어요.” 잠시 그때 생각이 나는지 해단은 말을 멈추고 멋쩍게 웃었다. “처음에는 온갖 욕을 다 했어요. 북한 욕에 남한 욕도 배웠겠다, 거기 산 너머 아랫마을 사람들 귀가 좀 간지러웠을지도 몰라요. 저 때문에 산에 살던 청설모나 새들도 어지간히 골치 아팠을 것 같구요. 오죽하면 그 뒤로 이따금 제가 그 산 다시 찾아갈 때, 도토리랑 새 모이를 따로 사서 가겠어요.” 해단이 저 스스로가 생각해도 골 때린다는 듯이 실없게 웃었다. 


해단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하는 바다에 반짝이는 물결들을 바라봤다. 웃고 있으면서도 슬픈 듯한 표정이었다. 남 얘기 같지 않았다. 해단에게 그 산을 건네 준 장본인이 바로 세하였으니까. 세하는 자신의 지난날을 떠올렸다. 왜인지 웃기면서도 서글펐다. 누구의 산인 줄도 모르고 밤낮으로 올라가 소리치고, 한술 더 떠서 제 것인 양 해단에게 주고 오고 해단은 그걸 또 흘려듣지 않고 올라가서 자신이 했던 것처럼 했다는 게. 그때의 우리가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하고 웃기면서도 슬펐다. 

한참을 말없이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던 세하가 “고마워.” 말했다. 

“네? 뭐가요?” 

“이렇게 잘 커줘서. 살아 줘서, 고마워. 지금까지 너의 삶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지, 무엇을 느끼고 생각해오고 이겨왔을지 나는 감히 다 알지 못하지만, 그래서 어쩌면 내가 감히 다 알지도 못하면서 네게 이렇게 고맙다고 말하는 게 정말 실례일 수도 있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은 끝없이 길고 또 고될 수 있지만, 그래도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어. 지금까지 정말 수고했고 고생했고, 고마워.” 

세하을 바라보며 벙찐 채로 듣고 있던 해단이, 세하가 말을 맺음과 동시에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허공을 보며 말했다. “이야, 선배 답지 않게 왜 그런데요. 하하… 하.. 겨울의 서리라는 별명을 갖고 계신 분이 이렇게 갑자기 따뜻하시면 안 돼요…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큰 일 난다고, 어마이 아니,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는데…” 해단이의 목소리가 점차 떨렸다. 고개를 치켜들며 해단은 하늘을 바라봤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하늘에 빼곡히 박힌 별빛이 번져 서로 손에 손을 잡고 있는 듯했다. 


말을 마친 세하는 파도가 불어왔다 불어가는 걸 가만히 보고 있다가 느껴지는 고요에 해단이 있는 옆 쪽을 바라봤다. 해단은 어느새 웅크린 채로 두 팔과 두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해단의 온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울고 있었다. 해단의 우는 모습을 보며 세하는 우는 해단이 안쓰럽고 자신의 심장이 꽉 막히며 숨통이 죄어드 걸 느꼈다. 잠시 잊고 지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울면 맞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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