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수민 Oct 30. 2022

17.

- 읽으며 들으면 좋을 asmr : 애써 고된 길을 가는 이에게 https://www.youtube.com/watch?v=tpq-R2mk-Yc 




“여기 있었기래.”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해단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서라요. 안전하다.” 

아까 복면을 쓰고 있던 그 사람이었다. 해단은 황급히 동생을 찾아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명호도 곁에 누워 있었다. 안심이 된 해단은 그제야 숨을 돌렸다. 

“아우, 깨우라. 여서 날래 빠져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는 몸을 돌려 주섬거리며 무언가를 챙겼다. 

“이제 어디로 가야함네…” 그의 어깨에 손을 댄 해단이 황급히 물리며 자신의 손에 묻은 걸 바라봤다. 피였다. 

“여긴 와 이럽네까.” 

“일 없다.” 

그는 자신의 옷에서 찢어낸 천으로 오른쪽 어깨 죽지를 동여맸다. 그의 오른쪽 어깨로부터 팔을 따라 시선을 내려가니 손이 없었다. 거칠게 뜯긴 자국이 나 있었다. 아마도 아까 인민군이 데려온 사냥개에 물린 듯싶었다. 

“아까 우리 구하다가 이래 된 겁네까.” 

“……”

“왜 이렇게까지 하심네까. 우린 드릴 것도 없슴네다. 당신도 북한 사람이니 알잖슴네까. 길에서 아그들이 죽어나는데도 다들 모른 척 제 갈 길 가기 바쁨네다. 자식들을 내치고 나 몰라라 하는 아비, 어매도 허다한데 쌩판 남인 당신은 와 이렇게 도와주심네까. 어디 팔아먹으려고 그러심네까. 무섭슴네다. 정들까 봐, 무서워 죽겠슴네다.”

“내래 맘이다. 같은 곳에 산다고 다 똑같은 사람은 아니지 않간. 그란 사람이 있으믄 이런 사람도 있는 기래. 사람이 사람을 돕는데 꼭 뭐가 필요하진 않타. 기냥 마음이 가니께 따라가는 거라우. 그라코 리유(^이유)가  필요하믄, 아까 말하지 않았나. 너거 부모님게 진 빚이 있다고. 기래 생각하라우. 그라고 너거 팔아넘길 생각도 없다. 돈에 관심도 없고. 내래 가족도 없고 몸뚱이라곤 내 하나뿐인디 너거들 목숨 팔아 갖고 나 하나 잘 먹고 잘 살아서 뭣에 쓰나. 네가 알간? 글믄 좀 알려 주라우. 내도 좀 알고 싶구만. 살아서 사는 삶 말고, 살고 싶어서 사는 삶이란 게 무신건지.” 그리곤 그는 주머니에서 꺼낸 빛바랜 녹색 철물통으로 목을 축인 다음 입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해단에게 “좀 들라우.” 내밀었다. 

해단은 물통을 받아 잠시 머뭇거렸다가 들이켜 목을 축인 다음 이제 막 깨어나 비몽사몽 한 채로 있는 명호에게도 물을 건넸다. 

“강 따라 여로 쭉 내려가면 바다와 만나는 구간에 배가 하나 있을 기래. 가자우.” 그가 말했다. 


세 사람은 말없이 물길을 따라 걸었다. 유난히 달이 밝은 밤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졸리다고 칭얼거렸을 명호도 좀체 말이 없었다. 대신 명호는 걷다가 발에 채이는 돌멩이를 하나씩 주워 옆에 있는 강 물가로 던지며 지루함을 달랬다. 

앞에서 걷던 그는 퐁당거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이따금 고개를 돌려 강가를 바라보다가 “물뜨기(^물수제비)라고 아나.” 물었다. 

“글믄요. 우리 아바이한테 배웠슴네다. 우리 아바이는요, 물뜨기 선수라요. 이런 강가 말고도 파도 부는 데서도 물뜨기를 열 개나 넘게 뜨신다고 했슴다. 그라고…” 신나서 얘기하던 명호는 순간 말을 멈추고 옆에서 걷던 해단을 바라봤다. 

해단은 입술을 굳게 말아 물고는 땅을 보며 걷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요.” 명호는 해단을 따라 입술을 말아 물며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곤 “암튼 할 줄 압네다.” 웅얼거리며 말했다. 

흙길을 따라 밟는 세 사람의 발자국 소리와 강물이 흐르는 소리 사이사이로 풀벌레가 울었다. 


“내래 세상에 태어나가 처음으로 본 기 감옥 창살이었다.” 

명호와 해단의 숙여진 고개가 일제히 올라가며 그의 등을 바라봤다. “어머이는 내를 낳다가 돌아가셨고 아바이는 너무 맞아가지고 앞을 못 봤다. 그라고 얼마 안 가가 돌아가셨고. 내래 가장 먼저 배워야 했던 건, 배가 고파도 울지 않는 기였다. 오른손은 원래 없었다. 어릴 때 감옥서 울지 말라는데 울어 갖고 인민군 병사한티 맞았는데 곪아 터져가가 잘라냈는기라. 아까 싸우다 잃어버린 건 가짜손이랴. 원래 없던 기래. 그 위에 살이야 조금 더 뜯긴 거고. 기러니까 일 없는 기라.”

울렁이는 물결을 따라 비추인 달빛도 일렁였다. 밤에는 그늘이 없었다. 밝은 곳. 좀 더 밝은 곳. 어두운 곳. 좀 더 어두운 곳. 밤에 깨어있는 모두가 달빛이 내어준 옷을 입고 빛이 없는 낮을 지샜다. 


“너거 아버이 눈 한쪽이 아니 보이는 거 알간.” 한참을 말없이 걷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바이말임네까?” 놀란 듯 아까까지 졸음에 눌려 내려앉아 있던 눈꺼풀을 번뜩 뜨며 명호가 물었다. 

“왼쪽 눈, 그거이 가짜 눈인기라.” 

“누님은 아셨슴네까?” 

해단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일에 대해,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알고 싶었다. 해단의 머릿속은 온통 복잡해져 있었다. 근 하루 만에 일어난 이 모든 일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어제가 자꾸만 까마득하게 느껴져서, 거듭 되새김질하듯 어제를 되새겨야 했다. 어머니의 죽음도, 아버지란 작자도.

“길케 맨든 게 내다.” 그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다. “내 아바이도 죽고 감옥 밖으로 쫓겨나가 길거리 생활을 하던 중에 니네 아바이를 만났다. 그때 나가 뵈는 게 없어 갖고 니 아바이가 들고 있는 음식 빼앗겠다고 덤벼 들어 싸우다가 내래 휘두른 돌에 니 아바이 눈이 맞은기라. 그라고 한참을 싸우다가 먼저 의식을 잃은 건 내였고. 근데도 느그 아버이는 내를 느그 집에 데려다가 먹이고 재웠다.”

“그거이 아재 잘못이 아닌기라.” 잠잠히 듣고 있던 해단이 말문을 열었다. “내도 자세히는 잘 모르지마네, 그전부터 다쳤던 기래. 어머이랑 아버이랑 같이 있을 때 다친기라 들었슴네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해단을 바라봤다. 

여전히 복면을 쓰고 있어 그의 표정이 어떤지 해단은 알 수 없었으나 무언가 동요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해단은 돌을 주우려던 명호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뒤로 세웠다. 

“그거이 빚이었슴네까. 글믄 아닌 걸 알게 되었으메 인차(^이제) 우릴 어떻게 하실겁네까.” 

고개를 아래로 숙이며 그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아이다. 다행이라서, 다행이라 글타. 글고 내래 아까 한 얘기를 어데로 들었나. 너거들을 무사히 남으로 보내는 기. 고거이 임무이기 전에 내도 원하는 기래.” 그리곤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앞장서서 걸어갔다. 해단은 그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봤다. “발소리가 와 아이 들리나. 날래 가자우. 갈 길이 많타.”

그의 뒤를 따라 걷던 명호가 몸을 돌려 제 쪽으로 손짓하며 해단을 불렀다. “와 아이 오심까. 날래 와라요.” 달빛에 물빛에 비추인 명호의 얼굴에 그늘이 없었다. 


해맑게 웃는 명호를 보며 해단은 생각했다. 어머니, 하늘엔 잘 도착하셨을까요. 어머니, 오랜만에 명호가 말갛게 웃습니다. 어머니, 언젠가 밝은 달빛을 두고 참으로 시리다 하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때에 저는 왜 밝고도 아름다운 걸 보며 시리다 하시는지 여쭈었고 어머니는 그저 조용히 미소 지으셨지요. 저도 이제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어머니, 저 아이의 말간 웃음이 참으로 따스하여서, 마음이 시립니다. 명호의 얼굴에  어떠한 그늘도 서리지 않았으면 하는 건, 제 욕심일까요. 저 아이의 얼굴에 따스한 웃음이 영영 지지 않았으면 하여, 이토록 마음이 시린가 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상, 그러긴 쉽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지켜주세요, 어머니. 우리 명호를, 저 웃음을. 

이전 16화 16.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